본문 바로가기
인공지능과 함께 고전읽기

셰익스피어 4대 비극

by 구교수 2026. 5. 12.

셰익스피어 4대 비극 — 인간이 무너지는 네 가지 풍경

열일곱이었던가, 열여덟이었던가. 학교 도서관 구석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의 표지에는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 해골을 들고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었다. 그날 나는 첫 페이지를 펼친 채 자정이 가까워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붙들었을까. 줄거리는 아니었다. 복수극의 골조라면 그 무렵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나를 사로잡은 것은 한 남자가 자기 자신에게 끝없이 묻고 또 묻는, 그 기이한 풍경이었다. 그는 생각함으로써 행동하지 못했고, 행동하지 못함으로써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망설임 속에서,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그때마다 인물들의 얼굴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햄릿은 어떤 해에는 천재였고, 어떤 해에는 어린아이였다. 오셀로는 어떤 날 영웅이었다가, 다른 날 그저 길 잃은 외로운 사내였다. 리어 왕은 처음엔 어리석은 노인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 자신처럼 보였다. 맥베스는… 맥베스는 가장 두려운 거울이었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네 편을 단순히 위대한 희곡이 아니라, 인간이 무너지는 네 가지 풍경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 하필 네 편인가

4대 비극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셰익스피어 자신이 묶어둔 작품의 묶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셰익스피어는 평생 서른여덟 편가량의 희곡을 썼고, 그중 비극으로 분류되는 작품만 해도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어스 시저』,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코리올라누스』, 『아테네의 타이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까지 적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4대 비극'이라 부를 때는 다음 네 작품을 가리킨다.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

이 네 편을 한데 묶어 정전(正典)의 한복판에 올려놓은 사람은 영국의 비평가 A. C. 브래들리였다. 그는 1904년에 펴낸 『셰익스피어 비극』에서 이 네 작품을 본격적으로 한 묶음으로 다루었고, 이후 세계의 셰익스피어 연구는 사실상 이 분류를 기본 틀로 받아들였다. 브래들리의 시선은 매우 분명했다. 그는 이 네 작품이 모두 한 인물의 내면적 결함에서 비롯된 파국을 그리고 있다고 보았다. 외부의 운명이 아니라, 인물 자신의 무엇인가가 그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관점에서 보자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운명(moira)의 비극이 아니라 성격(hamartia)의 비극에 가깝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네 편은 모두 1600년에서 1606년 사이, 단 6년의 짧은 기간에 쓰였다. 셰익스피어가 마흔에서 마흔둘 무렵, 곧 인생의 한복판이자 작가로서의 절정기에 그는 마치 한 번의 깊은 호흡으로 인간의 무너짐을 네 가지 다른 각도에서 그려낸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기를 그의 '비극의 폭풍' 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6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그토록 어두운 풍경 속으로 들어갔을까. 그의 외아들 햄닛이 1596년에 죽었고, 그의 아버지가 1601년에 죽었으며, 엘리자베스 1세가 1603년에 죽었고, 영국은 새로운 왕조의 불안 속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외부의 사건들만으로 이 폭풍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가들에게는 — 톨스토이가 그러했듯,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러했듯 — 인생의 한가운데서 비로소 가장 깊은 어둠과 마주할 수 있는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

네 작품의 공통점을 짚어보자면 이렇다. 첫째, 주인공은 모두 높은 위치에서 시작한다. 왕자, 장군, 왕, 또 다른 장군.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 시대의 무게를 등에 진 인물들이다. 둘째, 모두 한 가지 결함을 안고 있다. 햄릿의 결함은 사유의 과잉이고, 오셀로의 결함은 신뢰의 결핍이며, 리어의 결함은 자기 인식의 부재이고, 맥베스의 결함은 욕망의 통제 불능이다. 셋째, 이 결함이 작품 안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작동하여, 그들을 회복 불가능한 곳까지 밀어 넣는다. 넷째, 모두 죽음으로 끝난다. 다만 죽음의 의미가 각기 다르다. 햄릿의 죽음은 어떤 평화 같은 것이고, 오셀로의 죽음은 수치의 끝이며, 리어의 죽음은 가장 슬픈 화해이고, 맥베스의 죽음은 거의 자업자득의 결산이다.

그런데 왜 다섯 편이 아닌 네 편인가. 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나 『코리올라누스』는 4대 비극에서 빠졌는가. 브래들리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작품의 무게중심이 한 인물의 내면에 놓여 있을 것. 둘째, 그 인물의 결함이 외부의 운명과 결합하여 파국을 만들어낼 것. 셋째, 작품이 우주적 차원의 질문 —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선과 악의 본성은 무엇인가 — 을 던질 것.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정치극의 성격이 강하고, 『코리올라누스』는 사회와 개인의 갈등이 중심에 있다. 그러나 이 네 편에서는 인간의 영혼 자체가 무대다. 브래들리의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21세기의 학자들은 그의 기준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네 편을 함께 읽을 때, 우리는 인간이 무너지는 방식에 대한 어떤 지도를 손에 쥐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왜 비극을 읽는가. 왜 사람들은 400년이 지난 지금도 비극의 무대 앞에 앉아 두 시간 넘게 어둠을 응시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카타르시스, 곧 감정의 정화라고 불렀다. 우리가 직접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무대 위에서 대신 겪게 하는 것이 비극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고 나면, 나는 정화되었다기보다는 어딘가 베인 것 같다. 마음에 작은 칼자국이 생기고, 그 자국이 오래 남는다. 그 자국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간은 무너질 수 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한 것에 의해, 가장 자기다운 것에 의해, 가장 자신 있어 했던 것에 의해.

햄릿 — 생각이 행동을 삼킬 때

『햄릿』의 첫 장면은 한밤중의 엘시노어 성벽 위에서 시작된다. 보초들이 떨고 있다. 며칠 째 같은 시각에 죽은 왕의 유령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을 유령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햄릿이라는 인물은 이미 죽은 자의 명령을 짊어진 채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그의 시작은 자기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자의 요구다. 그리고 이 사실이 그를 평생 떠나지 않는다.

줄거리는 이렇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직후 어머니 거트루드가 삼촌 클로디어스와 재혼하는 광경을 마주한다. 곧이어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자신은 클로디어스에게 독살당했다며 복수를 명한다. 햄릿은 복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복수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미친 척을 하고, 연극 안에 연극을 끼워 넣어 클로디어스의 죄를 확인하고, 어머니를 꾸짖고, 폴로니어스를 실수로 죽이고, 오필리아를 미치게 만들고, 영국으로 추방되었다가 돌아오고, 마침내 결투의 끝에서야 비로소 클로디어스를 죽인다. 그리고 자신도 죽는다. 그 사이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햄릿의 결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한다는 데 있다. 그는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라, 행동을 지연시키는 인물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는 사실 복수에 관한 독백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햄릿은 복수를 앞두고도 자신이 누구인지,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묻는 동안, 그를 둘러싼 세계는 부서져간다.

나는 햄릿을 읽을 때마다 이 인물이 어떻게 그토록 현대적일 수 있는지 새삼 놀란다. 셰익스피어는 17세기 초의 작가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내놓기 약 40년 전이다. 그런데 햄릿은 이미 생각하는 자아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인물이다. 자기 자신에게 비평가가 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행동하지 못한다. 행동은 망설임 없는 자아를 요구하는데, 햄릿의 자아는 망설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T. S. 엘리엇은 흥미로운 비판을 남겼다. 그의 1919년 에세이 「햄릿과 그의 문제」에서, 엘리엇은 햄릿을 셰익스피어의 '예술적 실패'라고까지 부른다. 햄릿이 느끼는 감정의 강도에 비해, 그를 둘러싼 사건이 그만큼의 감정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이를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의 부재라고 표현했다. 햄릿의 절망은 어머니의 재혼이라는 사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감정은 사건보다 크고, 그래서 어딘가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나는 엘리엇의 비판이 흥미롭다고 생각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햄릿의 위대함이라고 본다. 그의 감정은 사건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감당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햄릿은 어머니의 재혼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 그 자체에 절망하고 있다.

폴란드의 비평가 얀 코트는 1964년에 출간된 『셰익스피어, 우리의 동시대인』에서 햄릿을 거울에 비유했다. 시대마다 사람들은 햄릿이라는 거울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춰본다는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자들에게 햄릿은 감성적이고 섬세한 시인이었다. 20세기 정신분석가들에게 햄릿은 어머니에 대한 미해결된 욕망에 사로잡힌 신경증 환자였다. 냉전기 동유럽의 지식인들에게 햄릿은 부패한 권력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정치적 양심이었다. 21세기의 우리에게 햄릿은…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햄릿에게서 본다. 어쩌면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된 시대에, 진실의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에게서 본다.

햄릿이 죽기 직전에 호레이쇼에게 남기는 말이 있다. "남은 자들에게 내 이야기를 전해다오." 이 마지막 대사가 나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햄릿은 자신의 비극을 자신만의 비극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요청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 이야기를 읽는다. 햄릿은 결국 우리에게 한 가지를 묻고 있다.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행동하면서도 어떻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것인가.

오셀로 — 신뢰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오셀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화가 났다. 작품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화가 났다. 어떻게 한 사내가 그토록 쉽게 속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토록 의심도 없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오셀로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외로웠던 것이다. 그리고 외로움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

이야기의 무대는 베네치아와 키프로스다. 무어인 출신의 장군 오셀로는 베네치아 원로원의 신뢰를 받는 인물이다. 그는 데스데모나라는 백인 귀족 여성과 비밀리에 결혼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진실하다. 그러나 오셀로의 부하 이아고가 자신을 부관으로 승진시켜주지 않은 오셀로에게 앙심을 품고,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라는 다른 부관과 부정을 저질렀다는 거짓 의심을 그의 마음에 심어 넣는다. 손수건 한 장이 결정적인 증거로 조작되고, 오셀로는 결국 자신의 아내를 침대 위에서 목 졸라 죽인다. 진실이 드러났을 때, 오셀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오셀로의 비극은 신뢰의 비극이다. 그는 한 명을 너무 깊이 신뢰했고, 다른 한 명은 충분히 신뢰하지 못했다. 이아고를 너무 믿었고, 데스데모나를 충분히 믿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셰익스피어는 이 질문에 단순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는 오셀로의 인종, 사회적 위치, 나이, 성격을 모두 작품 안에 짜 넣는다. 오셀로는 무어인이다. 베네치아 사회에서 그는 능력으로 자리에 올랐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인이다. 그는 자신이 진짜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데스데모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조차 그에게는 늘 어딘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너무 좋은 일은 두렵다. 그래서 이아고가 의심의 씨를 심을 때, 그 씨는 이미 비옥한 토양에 떨어진다.

이아고라는 인물은 영문학사에서 가장 어두운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이아고의 동기를 '동기 없는 악의(motiveless malignity)'라고 부른 적이 있다. 작품 안에서 이아고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댄다. 부관 자리에서 밀려난 분노. 오셀로가 자신의 아내와 잤다는 소문에 대한 의심. 데스데모나에 대한 욕망. 그러나 이 이유들은 어딘가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 마치 이아고 자신이 자기 행동의 진짜 이유를 모르는 것 같다. 또는 그가 진짜 이유를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아고가 그저 파괴 그 자체를 즐기는 인물이라고 본다. 또 어떤 비평가들은 이아고가 오셀로 안에 있는 어두운 자아의 외화(外化)라고 본다. 어느 쪽이든, 그는 외부의 적이라기보다 오셀로 내부의 의심을 깨우는 촉매에 가깝다.

손수건의 모티프는 작품의 가장 슬픈 장치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게 선물한 손수건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사랑의 정표였다. 그것이 이아고의 손에 들어가고, 카시오의 손에 들어가고, 결국 오셀로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증거'가 된다. 사랑의 정표가 살인의 근거로 바뀌는 이 과정은, 어떻게 한 가지 사물이 누구의 손에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셀로는 손수건의 위치를 의미로 읽었다. 그러나 그는 잘못 읽었다.

20세기 후반의 탈식민주의 비평은 오셀로를 다시 읽도록 했다. 인도 출신의 비평가 아니아 룸바, 미국의 셰익스피어 학자 킴 홀 등은 오셀로가 단순한 사랑과 질투의 비극이 아니라, 인종과 권력의 비극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베네치아라는 백인 사회 한복판에 들어온 흑인 남성이 어떻게 그 사회의 인종적 응시 아래에서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가. 오셀로의 마지막 대사 — "베네치아에 한 가지를 더 전해다오. 너무 잘 사랑했으나 현명하게는 사랑하지 못한 자가 있었다고" — 는 단순한 자기 변호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조차 베네치아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자의 마지막 진술이다.

나는 오셀로를 읽을 때마다 한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정말로 알고 있는가. 사랑은 앎인가, 아니면 끊임없는 모름의 견딤인가. 오셀로의 비극은 그가 사랑을 앎으로 환원하려 했다는 데 있다. 그는 데스데모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랑은 증명되지 않는다. 다만 견뎌질 뿐이다.

리어 왕 — 권력의 옷을 벗는다는 것

『리어 왕』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가장 잔혹한 작품이다. 그것은 한 노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가는 과정을 끝까지 보여준다. 권력을, 가족을, 정신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장 사랑한 딸을. 나는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어딘가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에 한동안 책을 덮어두었다. 그것은 위로가 없는 비극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단순하다. 나이 든 영국의 왕 리어는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누어주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조건을 건다. 누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지를 말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딸 고너릴과 둘째 딸 리건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아버지를 추켜세운다. 그러나 막내딸 코델리아는 침묵에 가까운 진실한 말만을 한다. "저는 의무에 따라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분노한 리어는 코델리아를 추방하고, 왕국을 두 언니에게 나누어준다. 그러나 곧 두 딸의 본성이 드러나고, 리어는 자기 자신의 왕국 안에서 노숙자가 된다. 그는 폭풍이 몰아치는 황야에서 광인이 된다. 코델리아가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지만, 전쟁은 패배로 끝난다. 코델리아는 처형되고, 리어는 그녀의 시신을 안고 슬픔에 무너지며 죽는다.

리어의 결함은 무엇인가. 셰익스피어는 그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리어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사랑받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는 권력의 옷을 입은 채로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권력이 요구하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굴종에 가깝다. 코델리아는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침묵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권력 앞에서 증명하기를 거부했다. 그것이 그녀의 위대함이고, 또한 그녀의 추방 사유다.

이 작품이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없이도 자기 자신일 수 있는가. 왕의 옷을 벗은 리어는 누구인가. 작품의 한복판, 폭풍이 몰아치는 황야에서 리어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외친다. "오, 헐벗은 가련한 인간들이여! 너희는 어디에 있든 이 무자비한 폭풍을 견디고 있구나." 그가 비로소 자신을 다른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이다. 권력의 옷을 벗기 전까지, 리어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자기 자신의 헐벗음을 겪고 나서야 그는 처음으로 인간이 된다. 그러나 그 인간 됨의 대가는 끔찍하다. 그는 광기 속으로 들어간다.

19세기까지 영국 무대에서 『리어 왕』은 거의 원작 그대로 상연되지 않았다. 1681년에 네이엄 테이트라는 극작가가 결말을 바꿔 코델리아를 살리고, 리어가 왕위를 회복하는 '행복한 결말' 판본을 만들었는데, 그 판본이 약 150년간 표준 공연 대본이었다. 사람들은 원작의 결말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새뮤얼 존슨조차 이 결말이 너무 잔인하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왜 이 작품을 그렇게 끝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는 정의의 환상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코델리아는 선하다. 그러나 선하다는 이유로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리어는 깨달았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해서 잃은 것을 되찾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그렇다.

20세기에 들어 『리어 왕』은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읽혔다.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코델리아라는 인물을 가부장적 권력 구조에 대한 침묵의 저항으로 읽었다. 정신분석 비평가들은 리어와 세 딸의 관계를 아버지와 딸 사이의 무의식적 권력 게임으로 분석했다.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는 1985년 영화 『란(亂)』에서 이 작품을 16세기 일본 전국시대로 옮겨 놓으며, 권력과 가족의 비극이 어떤 시대 어떤 문화에서도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독자에게 이 작품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종종 이 작품을 한국의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풍경과 겹쳐 본다.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부모, 그러나 늙어서 외로워진 그들. 효(孝)의 문화 안에서 사랑을 의무로 표현해야 하는 자식들, 그러나 그 표현이 진심인지 형식인지 스스로도 구별하기 어려운 그들. 『리어 왕』은 결국 효의 한복판에서 만들어지는 비극이기도 하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한다. 리어는 죽은 코델리아를 안고 있다. "왜 개에게는, 말에게는, 쥐에게는 생명이 있는데, 너에게는 숨이 없느냐." 이것이 비극의 본질이다. 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인간은 무너진다.

맥베스 — 야망이 영혼을 갉아먹는 시간

4대 비극 중 가장 짧은 작품이 『맥베스』다. 분량은 가장 적지만, 응축된 어둠은 가장 깊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욕망에 의해 단계적으로 무너져가는지를, 거의 임상적인 정밀함으로 보여준다. 나는 종종 이 작품을 양심의 해부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 명의 마녀를 만난다. 마녀들은 그가 코더의 영주가 될 것이며, 결국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첫 번째 예언이 즉시 실현되자, 맥베스의 마음 속에 두 번째 예언에 대한 욕망이 자라난다. 그의 아내 레이디 맥베스는 그를 부추긴다. 마침 던컨 왕이 그들의 성을 방문한다. 그날 밤, 맥베스는 잠든 왕을 살해한다. 그리고 그 살인의 순간부터, 그는 한 번도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 친구 뱅코를, 맥더프의 가족을. 죽일수록 그의 죄책감은 깊어지고, 죄책감이 깊어질수록 그는 더 잔혹해진다. 마침내 맥더프가 군대를 이끌고 와 그를 죽인다.

맥베스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그가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작품의 시작에서 그는 영웅이다. 충성스러운 신하이고, 용감한 장군이고, 사랑받는 남편이다. 그러나 한 번의 살인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셰익스피어는 이 변화를 천천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단번에, 칼날처럼 보여준다. 던컨 왕을 죽이고 침실에서 돌아온 맥베스가 자신의 손을 보며 말한다. "이 손을 보면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것은 내 손이 아니다." 살인은 그를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놓는다. 그 순간 이후, 맥베스는 결코 자신의 손을 다시 자신의 손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레이디 맥베스라는 인물은 셰익스피어가 그린 여성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다. 그녀는 작품의 전반부에서 남편보다 더 단호하고 더 결연하다. "오라, 영혼들이여, 나의 여성성을 빼앗아가라"라는 그녀의 독백은 권력에 대한 그녀의 갈망이 어떤 종교적 자기 부정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작품 후반부에서 그녀는 무너진다. 그녀는 잠 속에서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닦으려 한다. "사라져라, 저주받은 얼룩이여, 사라져라!" 그러나 얼룩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자살한다. 셰익스피어는 양심이라는 것이 의지로 통제될 수 없는 무엇임을 이 두 사람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은 의지로 살인을 했지만, 의지로는 죄책감을 끝낼 수 없었다.

맥베스의 가장 유명한 독백은 작품의 거의 끝에서, 레이디 맥베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직후에 나온다. "내일과 내일과 또 내일, 시간은 이 작은 걸음으로 하루하루 기어가,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에 이른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어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흙먼지의 죽음으로 가는 길을 밝혀주었을 뿐이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이여.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자기 차례를 뽐내고 안달하다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는 가련한 배우,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음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이것이 맥베스의 결말이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가 얻은 왕관은 그에게 아무런 무게도 없다. 그것은 흙먼지 위에 놓인 빈 그릇이다.

이 독백을 읽을 때마다 나는 한 가지를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는 야망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는 야망이 양심과 분리될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맥베스의 비극은 그가 무엇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원했던 것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을 죽였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죽은 부분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닌다. 양심은 살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무덤에서 일어나 끝없이 우리를 부른다.

20세기 이후 『맥베스』는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오슨 웰스(1948), 로만 폴란스키(1971), 저스틴 커즐(2015), 조엘 코엔(2021). 각 영화는 시대의 어둠을 자기 방식으로 비추었다.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그의 아내 샤론 테이트가 잔혹하게 살해된 직후에 만들어졌고, 그 영화의 잔혹함은 감독 개인의 트라우마와 분리될 수 없다. 베르디는 1847년에 이 작품을 오페라로 옮겼는데, 그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맥베스가 아니라 레이디 맥베스라고 보았다.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는 1957년 영화 『거미의 성』에서 맥베스를 일본 전국시대로 옮겨 놓았다. 한국의 무대에서도 『맥베스』는 끊임없이 다시 올려진다. 어쩌면 우리는 권력의 시대에 살고 있고, 권력 앞에서 양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늘 다시 묻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네 비극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것 — 그리고 묻지 못하는 것

지금까지 나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거의 경외에 가까운 시선으로 다루어왔다. 그러나 정직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들이 가진 한계도 함께 짚어야 한다. 위대한 작품은 그 한계 안에서 위대하다.

첫째, 페미니즘 비평이 오래도록 지적해온 문제가 있다. 4대 비극의 여성 인물들은 대체로 평면적이다. 거트루드는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한 차원으로 환원된다. 오필리아는 광기와 죽음으로만 기능한다. 데스데모나는 거의 천사 같은 무력함으로 그려진다. 코델리아는 침묵하고 사라진다. 레이디 맥베스만이 어느 정도 입체적인데, 그녀조차 결국 광기와 자살이라는 결말로 처리된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가장 깊은 어둠을 그릴 수 있었지만, 그 어둠의 주체로 여성을 거의 세우지 못했다. 여성들은 남성 주인공의 비극을 비추는 거울이거나, 그의 비극을 촉발하는 계기로만 기능한다. 21세기의 독자로서 우리는 이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인종의 문제다. 『오셀로』는 무어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점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으나, 동시에 이 작품은 흑인 남성을 결국 야만적 폭력의 주체로 그리는 인종적 무의식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오셀로의 결함이 그의 외부인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결국 자기 아내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작품 바깥의 인종적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도 그가 자신의 시대 안에 갇혀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셋째, '보편성'이라는 신화의 문제다. 셰익스피어는 흔히 '보편적'인 작가라고 불린다. 그러나 어떤 보편성도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보편성은 누군가가 보편이라고 명명한 결과다. 19세기 영국 제국주의가 셰익스피어를 식민지의 학교 교과서에 올려놓을 때, 그것은 영국 문화의 우월성을 자연화하는 한 장치였다. 케냐의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는 자신의 식민지 시절 교육에서 셰익스피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비판적으로 회고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어떻게 우리에게 도달했는지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네 편의 비극을 사랑한다. 그것은 이 작품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한계를 인식하면서 읽을 때, 이 작품들이 비로소 더 깊이 말을 걸어온다. 햄릿이 묻는 것은 우리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오셀로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직면하기 두려운 우리 자신의 의심이다. 리어가 통과하는 것은 우리가 언젠가 통과해야 할 헐벗음의 시간이다. 맥베스가 잃는 것은 우리가 매일 작은 방식으로 잃고 있는 양심이다. 이 네 작품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더 정확히 물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어떤 시대에는, 더 정확히 묻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닫지 않는 마지막 문장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열일곱이었던 나는 이제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읽었고, 살았고, 잃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여전히 나에게 새롭다. 다시 펼칠 때마다 다른 문장이 밑줄을 그어달라 손짓한다. 그것은 작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비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어쩌면 이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의 무엇이라는 것. 햄릿에게는 사유의 깊이가, 오셀로에게는 신뢰의 외로움이, 리어에게는 자기 인식의 부재가, 맥베스에게는 야망의 무게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자질이 다른 상황에서는 그들의 위대함이기도 했다. 햄릿의 사유는 그의 깊이였고, 오셀로의 신뢰는 그의 사랑이었고, 리어의 자신감은 그의 왕다움이었고, 맥베스의 야망은 그의 용기였다. 비극은 이 자질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떻게 그들을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비극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질이 어떤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는지를 미리 들여다보는 일이다.

다음 장에서 나는 셰익스피어가 그린 비극의 풍경 옆에 또 다른 풍경을 놓아보려 한다. 19세기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린 비극, 곧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에서 한 가족이 무너지는 풍경. 셰익스피어가 무대 위에서 한 인간의 무너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무너짐을 천 페이지에 걸쳐 천천히, 거의 견딜 수 없이 천천히, 보여준다. 두 풍경을 나란히 놓고 본다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엇을 더 알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들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최종철 옮김, 민음사.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표준 번역. 각 작품이 단행본으로도 따로 출간되어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김정환 옮김. 시인 김정환의 운문 감각이 살아 있는 번역. — A. C. 브래들리, Shakespearean Tragedy (1904). 4대 비극을 함께 묶어 다룬 고전 비평서. 한국어 번역본도 존재하나 절판된 시기가 있으니 도서관 이용을 권한다. — 얀 코트, 『셰익스피어, 우리의 동시대인』 (원저 Shakespeare Our Contemporary, 1964). 냉전기 동유럽 지식인의 시선으로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은 명저. — 스티븐 그린블랫, Will in the World: How Shakespeare Became Shakespeare (W. W. Norton, 2004). 셰익스피어의 삶과 시대를 풍부하게 재구성한 전기적 비평. 미번역. — 해럴드 블룸, 『셰익스피어 인간성의 발명』, 까치 (원저 Shakespeare: The Invention of the Human, 1998).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발명했는지를 논한 야심작.

'인공지능과 함께 고전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욕 3부작 / 폴 오스터  (1) 2026.05.13
셰익스피어 5대 희극  (0) 2026.05.12
마음 / 나쓰메 소세키  (1) 2026.04.13
변신인형 / 왕멍  (0) 2026.04.13
홍루몽 / 조설근  (1) 2026.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