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5대 희극 — 웃음 뒤에 숨겨진 다섯 개의 거울
대학교 2학년 봄이었다. 나는 동아리 친구의 손에 끌려 어느 작은 극장에서 『한여름 밤의 꿈』을 보게 되었다. 무대는 좁았고, 배우들은 거의 학생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객석에는 빈 자리가 군데군데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두 시간 동안 거의 숨을 죽이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사로잡았을까. 줄거리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했다. 사랑의 묘약을 잘못 발라서 엉뚱한 사람에게 반하고, 요정들이 인간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한 남자는 당나귀 머리를 단 채로 요정 여왕의 사랑을 받는다. 그런데 그 어이없음 속에서, 나는 어쩐지 한참 동안 웃다가 마지막에는 가슴 어딘가가 조용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깊은 화해 같은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극들을 한 편씩 천천히 읽어왔다. 비극을 읽을 때는 어딘가 칼에 베이는 느낌이었다면, 희극을 읽을 때는 마치 잘 익은 과일을 한 입 베어 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과일 안에는 종종 작은 씨앗이 있었고, 그 씨앗은 단단해서 이가 부딪힐 때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단순히 즐거운 작품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웃음의 외피 안에 인간에 대한 가장 예리한 관찰을 숨겨두고 있다. 나는 이 다섯 편 —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 『헛소동』 — 을 우리 시대의 거울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섯 개의 다른 각도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된다.
비극과 희극은 무엇이 다른가
먼저 한 가지 질문을 짚고 가야겠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비극과 희극으로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학교에서 우리는 흔히 "비극은 슬프게 끝나고, 희극은 행복하게 끝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 구분은 너무 단순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그의 비극에도 종종 웃음이 흩어진다. 『맥베스』에는 성문지기의 익살이 있고, 『햄릿』에는 무덤 파는 자의 농담이 있다. 반대로 『베니스의 상인』에는 한 사람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가는 잔혹함이 있고, 『뜻대로 하세요』에는 추방과 박해가 배경에 깔려 있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분류 자체가 모호했다. 1623년, 그의 사후 7년 만에 동료 배우 두 명이 펴낸 첫 전집 — 우리가 '퍼스트 폴리오'라고 부르는 그 책 — 에서, 작품들은 희극(Comedies), 사극(Histories), 비극(Tragedies)의 세 묶음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분류조차 일관적이지 않다. 『심벨린』은 비극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흔히 후기 로맨스로 부른다.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어디에 속하는지 학자들도 늘 헷갈려 한다. 그러므로 '희극'이라는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관습이고, 어떤 약속이고, 어떤 시대의 합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희극이라고 부르는 작품들 사이에는 분명한 가족 유사성이 있다. 첫째, 사랑이 중심이다. 비극이 권력과 죽음을 중심에 두었다면, 희극은 거의 언제나 사랑을 중심에 둔다. 둘째, 결혼으로 끝난다. 영국의 비평가 노스럽 프라이는 희극의 구조를 '봄의 신화'에 비유한 적이 있다. 겨울 같은 어떤 장애 — 부모의 반대, 신분의 격차, 정체성의 혼란 — 가 봄의 결합 — 결혼, 화해, 잔치 — 으로 풀려나는 것이 희극의 기본 구조라는 것이다. 셋째, 변장과 오해가 핵심 장치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종종 남장을 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잘못 알아본다. 진실은 오해의 끝에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넷째, 숲이나 섬 같은 '바깥의 공간'이 등장한다. 도시나 궁정이 일상의 규칙으로 답답해질 때, 인물들은 숲으로, 바닷가로, 다른 나라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들은 일시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런 구조 안에서 셰익스피어는 무엇을 묻는가.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그의 비극이 "인간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물었다면, 그의 희극은 "인간은 어떻게 다시 만나는가"를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진 가족이, 적이었던 자들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 그 순간이 희극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 용서, 인정,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 의 형태다.
5대 희극이라는 분류는 한국에서 특히 자주 쓰인다. 영미권에서는 흔히 그의 희극 전체를 '낭만적 희극', '도시 희극', '문제극', '후기 로맨스' 등으로 세분하는데, 한국의 출판 전통에서는 위의 다섯 작품을 가장 빛나는 다섯 별로 묶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이 다섯 편은 모두 1595년에서 1601년 사이의 약 6년간 쓰였다. 셰익스피어가 막 서른을 넘긴 시기, 곧 그의 작가적 절정기 직전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희극들의 시기가 4대 비극의 시기(1600–1606)와 거의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그는 같은 시기에 한 손으로는 인간의 가장 환한 면을, 다른 한 손으로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그렸다. 어쩌면 한 작가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두 얼굴을 모두 본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한여름 밤의 꿈 —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는 아테네 근처의 숲이다. 그러나 이 숲은 보통의 숲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풀려나는 곳, 요정들이 인간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곳, 그리고 모든 정체성이 일시적으로 무너지는 곳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우연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우연성을, 비웃기보다는 부드럽게 끌어안는다.
이야기는 네 명의 젊은이로부터 시작된다. 헤르미아는 라이샌더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디미트리어스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한편 헬레나는 디미트리어스를 사랑하지만, 그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네 사람은 모두 숲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숲에서 요정 왕 오베론과 그의 시종 퍽이 사랑의 묘약을 잘못 사용하면서, 두 남자가 모두 갑자기 헬레나에게 반하고, 헤르미아는 버려진다. 한편 같은 숲에서, 아마추어 연극단의 직조공 보텀은 퍽의 장난으로 당나귀 머리를 단 채 요정 여왕 티타니아의 사랑을 받는다. 하루 밤이 지나고, 모든 묘약은 풀려나고, 사람들은 자신이 꾸었던 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도시로 돌아온다. 그리고 결혼식이 열린다.
이 황당한 줄거리 속에서 셰익스피어가 묻고 있는 질문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본다.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 사람의 본질 때문인가, 아니면 그저 어떤 우연한 화학 작용 때문인가. 묘약이라는 장치는 일종의 사고 실험이다. 만약 우리의 사랑이 정말로 본질에 기반한 것이라면, 묘약 따위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인물들의 사랑은 묘약 한 방울에 너무도 쉽게 바뀐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어쩌면 어떤 우연한 인상, 어떤 시기에 마주친 운명, 어떤 보이지 않는 화학 작용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고.
그러나 그렇다면 사랑은 환상에 불과한가. 그렇지는 않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네 명의 연인은 결혼한다. 그리고 그 결혼은 작품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그려진다. 셰익스피어가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시작이 우연일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우연을 받아들여 자기 삶의 진실로 만들어가는 인간의 능력이다. 묘약으로 시작된 사랑이라 해도, 그것을 끝까지 책임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묘약의 효과가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된다.
이 작품에는 또 한 가지 깊은 층위가 있다. 보텀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아마추어 연극단의 직조공으로, 자신이 모든 역할을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허세 가득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당나귀 머리를 단 채로 티타니아의 사랑을 받고 깨어났을 때, 그가 하는 독백이 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꿈을. 누가 이 꿈을 설명하려고 하면 그는 당나귀가 되리라." 이 대사는 작품 전체의 가장 깊은 곳이다. 보텀은 자신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경험이 그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었다는 사실은 안다. 셰익스피어는 이 어리석은 직조공의 입을 빌려, 어쩌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들은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마지막에 퍽은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본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저 잠시 졸다가 꾼 꿈이었다고 생각해주세요."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이라는 형식 자체가 일종의 공유된 꿈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함께 한 가지 환상을 꾸었고, 이제 그 환상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그 환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남겼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늘 정확히 말하지는 못한다.
베니스의 상인 — 법의 문자와 자비의 정신
『베니스의 상인』은 5대 희극 중에서 가장 어두운 작품이고, 또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작품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베니스의 젊은 귀족 바사니오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부유한 상속녀 포셔에게 구혼하고 싶지만 돈이 없다. 그의 친구이자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그를 위해 돈을 빌려주고자 하나, 그의 재산은 모두 바다 위의 배에 묶여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간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갚지 못할 경우 그의 살 1파운드를 가져가겠다는 계약서를 쓴다. 안토니오는 자신만만하게 서명한다. 그러나 그의 배들이 모두 침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빚을 갚지 못한 안토니오는 법정에 서게 된다. 그곳에서 남장을 한 포셔가 변호사로 등장하여, "살 1파운드를 가져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라"는 유명한 판결로 샤일록을 굴복시킨다. 샤일록은 재산을 잃고,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당한다.
이 작품이 어두운 이유는 명백하다. 샤일록이라는 인물의 처리 방식이 그러하다. 그는 작품 속에서 분명히 악역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그는 베니스의 기독교 사회로부터 평생 모욕당하고, 차별받고, 침 뱉음을 당해온 사람이다. 그의 딸은 기독교 청년과 사랑에 빠져 그의 보석을 훔쳐 달아났다. 그가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탐욕이 아니라, 평생 쌓인 분노의 폭발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인물에게 영문학사상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를 준다. "유대인은 눈이 없습니까? 유대인은 손이, 장기가, 신체가, 감각이, 애정이, 정념이 없습니까? 우리도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무기에 상처입고,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약으로 낫고, 같은 겨울과 여름에 데워지고 식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우리를 찌르면, 우리도 피를 흘리지 않습니까?" 이 독백을 읽고 나서 어떻게 샤일록을 단순한 악역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작품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다. 한쪽 얼굴은 16세기 영국의 반유대주의를 그대로 반영한다. 베니스의 기독교인들은 샤일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한다. 작품의 결말 — 강제 개종 — 은 21세기의 시선으로는 거의 견디기 어렵다. 다른 한쪽 얼굴은 그 반유대주의 자체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셰익스피어는 샤일록에게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가해자들의 위선을 보게 한다. 이 두 얼굴 중 어느 것이 진짜 셰익스피어인가. 학자들의 의견은 갈린다. 어떤 이들은 셰익스피어가 자기 시대의 편견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본다. 어떤 이들은 셰익스피어가 자기 시대의 편견을 비판적으로 드러냈다고 본다. 나는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 진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는 자기 시대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그 시대 안에서 한 인간으로서 가능한 가장 멀리까지 갔다.
법정 장면에서 포셔가 외치는 자비의 대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정점이다. "자비의 본성은 강요되지 않는다. 그것은 부드러운 비처럼 하늘로부터 떨어진다. 자비는 두 번 축복한다. 주는 자를, 그리고 받는 자를." 이 대사는 4세기에 걸쳐 무수히 인용되어 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자비를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한 포셔 자신은, 정작 샤일록에게는 거의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녀는 법의 문자를 가장 잔혹하게 사용해 그를 무너뜨린다. 셰익스피어는 이 모순을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그는 자비를 설교하는 자가 정작 자비를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의 위선을, 가장 화려한 수사 뒤에 가장 차가운 행동을 두는 방식으로 폭로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베니스의 상인』은 거의 모든 공연에서 새로운 해석을 받아왔다. 2004년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한 샤일록은 거의 비극의 주인공처럼 그려진다. 이스라엘의 무대에서 이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독일의 무대에서는 또 어떤 무게로 다뤄지는지, 각 사회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역사를 다시 마주한다. 한국의 독자에게도 이 작품은 결코 가벼운 읽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누가 '샤일록'의 자리에 있는가. 우리가 자비를 설교하면서 정작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가. 이 작품은 그런 질문을 멈추지 않게 한다.
뜻대로 하세요 — 숲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의 무대는 아덴의 숲이다. 이 작품에서 숲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숲은 도시와 궁정이 가진 모든 규칙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풀려난, 일종의 자유의 공간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만약 당신이 모든 사회적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공간으로 가게 된다면, 거기서 당신은 누가 될 것인가.
이야기의 시작은 추방이다. 공작 자리를 빼앗긴 노공작은 충직한 신하들과 함께 아덴의 숲으로 추방되어 살고 있다. 그의 딸 로잘린드는 사촌 셀리아와 함께 궁정에 남아 있었으나, 결국 새 공작의 미움을 사 함께 숲으로 도피한다. 도피 중 로잘린드는 안전을 위해 가니메데라는 이름의 남자로 변장한다. 한편 같은 숲으로, 그녀가 사랑하게 된 청년 올랜도도 형의 박해를 피해 들어와 있다. 그는 로잘린드를 만나기 전부터 그녀에 대한 사랑의 시를 나무에 새겨두고 있었는데, 정작 남장한 로잘린드 — 곧 가니메데 — 와 마주쳤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가니메데는 올랜도에게 "내가 당신의 로잘린드 역할을 해줄 테니, 사랑을 연습해보자"는 제안을 한다. 이 기묘한 사랑의 연습은 작품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로잘린드라는 인물에 거의 전부 담겨 있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여성 인물 중에서 가장 지적이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로잘린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그녀는 남장이라는 장치 뒤에서 평소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한다. 그녀는 사랑을 분석하고, 패러디하고, 진실하게 표현한다. 그녀는 올랜도에게 "남자는 사랑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말하고, 사랑의 환상을 까발리면서도 동시에 그 사랑 안에 머문다. 그녀는 사랑의 비평가이자 동시에 가장 깊은 연인이다.
남장이라는 장치는 셰익스피어 희극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베니스의 상인』의 포셔, 『뜻대로 하세요』의 로잘린드, 『십이야』의 비올라. 왜 셰익스피어는 이토록 자주 여성 인물에게 남장을 시키는가. 한 가지 답은 단순하다. 셰익스피어 시대 영국 무대에서 여성 역할은 모두 소년 배우가 연기했다. 그러니 여성이 남장을 하는 장면은 사실은 '소년이 여성을 연기하다가 다시 소년으로 돌아가는' 메타적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기술적 이유 너머에 더 깊은 무엇이 있다. 남장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여성에게 일시적으로 사회적 제약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장치였다. 여성으로서는 할 수 없었던 말, 갈 수 없었던 장소, 가질 수 없었던 자유를, 남장한 여성은 잠시 누릴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장치를 통해, 어쩌면 그의 시대가 여성에게 강요한 좁은 자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는 또 한 인물이 있다. 우울한 자크다. 그는 숲의 생활에 함께하면서도 늘 한 발짝 떨어져서 모든 것을 관찰하고 비웃는 멜랑콜리한 지식인이다. 그의 입에서 영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세계는 모두 무대이고, 모든 남자와 여자는 그저 배우들이다. 그들은 등장하고 퇴장한다. 한 사람은 자기 시대에 일곱 가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자크는 갓난아기에서 노인에 이르는 인간의 일곱 단계를 묘사한다. 이 독백은 단순히 인생에 대한 일반론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정체성이 결국 사회적 역할에 불과하다는, 어떤 허무에 가까운 통찰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이 우울한 통찰을 작품 전체로 흡수하지 않는다. 자크는 작품의 결말에서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이 결혼하고 도시로 돌아갈 때, 그는 홀로 남는다. 셰익스피어는 이 인물을 통해, 모든 화해의 잔치에도 끝까지 참여하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를 비웃지 않는다.
아덴의 숲은 결국 우리 안의 어떤 공간이다. 우리가 일상의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공간, 자기 자신을 다시 정의해볼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 공간.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아덴의 숲이 필요하다. 그것이 며칠의 여행일 수도 있고, 어떤 책 한 권일 수도 있고, 어떤 우정 안의 시간일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그 공간의 가치를 안다.
십이야 — 정체성의 가장 어지러운 카니발
『십이야(Twelfth Night)』는 셰익스피어 희극의 정점으로 흔히 평가받는 작품이다. 제목의 '십이야'는 크리스마스로부터 열두 번째 되는 밤, 곧 주현절 전야를 가리킨다. 중세 유럽에서 이 밤은 일종의 카니발이었다. 신분이 뒤집히고, 남녀가 옷을 바꿔 입고, 일상의 규칙이 잠시 무너지는 무질서의 축제.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 그런 카니발의 정신을 통째로 부어 넣었다.
이야기는 난파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쌍둥이 남매 비올라와 세바스티안은 폭풍 속에서 헤어진다. 비올라는 일리리아 해안에 떠밀려와, 오빠가 죽었다고 믿고 살아남기 위해 남장을 한 채 케자리오라는 이름으로 오시노 공작의 시종이 된다. 오시노 공작은 백작의 딸 올리비아를 사랑하고 있는데, 올리비아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며 일체의 구애를 거절한다. 오시노는 케자리오 — 곧 변장한 비올라 — 를 올리비아에게 보내 자신을 대신해 구애하게 한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케자리오에게 반해버린다. 한편 비올라는 점차 오시노를 사랑하게 된다. 이 삼각관계는 사실 사각관계다. 죽은 줄 알았던 세바스티안이 살아 돌아오고, 그가 누이와 똑같이 생긴 탓에 올리비아는 그를 케자리오로 착각해 결혼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것이 풀려나면서, 비올라는 다시 여성으로 돌아와 오시노와 결혼한다.
이 작품의 깊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있다. 올리비아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그녀는 처음에 케자리오 — 곧 비올라의 남성 가면 — 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녀는 결국 세바스티안 — 비올라의 진짜 쌍둥이 오빠 — 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외모가 같지만 다른 인간이다. 그녀의 사랑은 외모에서 시작되었으나, 결혼은 다른 인격과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사랑은 누구를 향하는가. 어떤 사람의 본질인가, 외형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투사한 무엇인가.
오시노 공작의 사랑은 더욱 흥미롭다. 그는 작품의 첫 장면에서 "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 계속 연주하라"라는 유명한 대사로 등장한다. 그는 사랑에 빠진 자신에 도취된 인물이다. 그가 진짜로 사랑하는 것이 올리비아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자기 자신인지 불분명하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에서 그가 비올라와 결혼하는 결말이 우리에게 묘한 감정을 남긴다. 그는 정말로 비올라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저 사랑이라는 상태를 사랑하는가. 셰익스피어는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잔혹한 처리를 받는 인물은 말볼리오다. 그는 올리비아의 청지기로, 도덕적이고 청교도적이고 엄숙한 인물이다. 그를 미워하는 다른 하인들이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 가짜 연애편지를 만들어 보내고, 그가 그것을 진짜로 믿어 우스꽝스러운 노란 양말에 가터를 두르고 올리비아 앞에 나타나게 한다. 그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어둠 속에 감금당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지지만, 말볼리오는 화해의 잔치에 끼지 못한 채 "내가 모두에게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무대를 떠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때, 그는 혼자다. 셰익스피어는 왜 이 인물을 이렇게 처리했을까. 어떤 비평가들은 셰익스피어가 청교도주의에 대한 그의 반감을 이 인물에게 투사했다고 본다. 또 어떤 비평가들은 카니발의 정신이 본질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고, 그래서 말볼리오는 이 축제의 제물이라고 본다. 어느 쪽이든, 그의 마지막 대사는 희극의 행복한 결말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결코 완전히 행복하지 않다. 누군가는 늘 잔치 바깥에 남는다.
이 작품에는 또 한 명의 인상적인 인물이 있다. 광대 페스테다. 그는 작품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농담을 던지며, 모든 인물의 어리석음을 가볍게 비춰낸다. 그가 작품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의 후렴 — "비는 매일같이 내린다(For the rain it raineth every day)" — 는 희극의 끝에 어울리지 않는 묘한 슬픔을 남긴다. 셰익스피어는 광대의 입을 통해, 결혼식의 잔치 뒤에도 인생의 비는 계속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행복한 결말은 끝이 아니다. 그 뒤에도 일상은 계속된다.
헛소동 — 말이 사람을 만든다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은 셰익스피어 희극 중에서도 가장 잘 짜인 작품이고, 가장 현대적인 감각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두 쌍의 연인의 이야기다. 한 쌍은 클라우디오와 히어로 — 전형적인 낭만적 연인이다. 다른 한 쌍은 베네딕과 비어트리스 —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에게 말의 칼날을 휘두르며 사랑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두 사람이다. 그런데 작품의 진짜 매력은 후자에 있다. 셰익스피어는 이 두 사람을 통해, 사랑이 어떻게 말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무대는 메시나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레오나토 영주의 집에 머문다. 그중 한 명인 클라우디오는 레오나토의 딸 히어로와 사랑에 빠진다. 한편 같은 일행의 베네딕과, 레오나토의 조카 비어트리스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말다툼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서로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 공언하는 인물들이다. 친구들은 이 두 사람을 골탕먹이기로 한다. 베네딕이 엿들을 만한 곳에서 "사실 비어트리스가 베네딕을 깊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비어트리스가 엿들을 만한 곳에서 "사실 베네딕이 비어트리스를 깊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한편 클라우디오와 히어로의 관계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악역 돈 존이 히어로가 부정한 행동을 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어내고, 클라우디오는 결혼식 당일 히어로를 모두 앞에서 모욕한다. 히어로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죽은 것으로 처리된다. 결국 진실이 밝혀지고, 히어로는 살아 돌아오며, 두 쌍은 모두 결혼한다.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제목 그대로 '말'이다. 영어 원제 "Much Ado About Nothing"에서 'Nothing'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뜻이고, 둘째로는 셰익스피어 시대 발음으로 'noting' — 곧 '엿듣기' 또는 '관찰' — 과 비슷한 발음이었다. 작품 전체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잘못 듣고, 잘못 보고, 잘못 말하는 이야기다. 클라우디오는 잘못된 증거를 보고 히어로를 의심한다. 베네딕과 비어트리스는 친구들의 거짓 정보를 듣고 사랑에 빠진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가지는 인상은 얼마나 자주 누군가가 우리에게 들려준 말, 우리가 우연히 엿들은 말에 기반하는가. 우리는 사람을 직접 만나기 전에 이미 말을 통해 만난다.
베네딕과 비어트리스의 관계는 셰익스피어가 그린 가장 현대적인 연애 관계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등하다. 그들은 서로의 지적인 면을 인정하고, 서로의 농담을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굴복이 아니라 인정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장면에서 비어트리스는 베네딕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한다. 그녀의 사촌 히어로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베네딕이 그녀를 모욕한 클라우디오에게 결투를 신청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가벼운 요구가 아니다. 클라우디오는 베네딕의 가장 친한 친구다. 그러나 베네딕은 결투를 신청한다. 그는 우정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명예를 우선한다. 이 장면은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다. 사랑이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리고 사랑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셰익스피어는 이 한 장면에 압축해 보여준다.
이 작품의 그늘은 클라우디오와 히어로의 관계에 있다. 클라우디오는 너무 쉽게 히어로를 의심한다. 그는 직접 그녀에게 묻지 않는다. 그는 결혼식 당일 모두 앞에서 그녀를 공개적으로 모욕한다. 진실이 밝혀진 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그 인정이 충분한가에 대해 비평가들의 의견은 갈린다. 21세기의 독자로서, 우리는 히어로가 그렇게 쉽게 그를 용서하는 결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녀는 왜 그를 용서하는가.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가. 셰익스피어 시대의 여성에게 부정의 누명을 한 번 쓴 후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그 누명을 씌운 남자와 결혼하는 것 외에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히어로의 용서는 어쩌면 사회적 강제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이 강제를 의식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가 적어도 어렴풋이는 의식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클라우디오와 히어로가 아니라 베네딕과 비어트리스인 것이다. 후자의 사랑이 전자의 모욕과 강제된 화해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다섯 거울이 비추는 것 — 그리고 비추지 못하는 것
다섯 편의 희극을 차례로 돌아보고 나니, 이 작품들이 단순한 즐길 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섯 개의 다른 각도에서 비춘다. 사랑의 우연성(『한여름 밤의 꿈』), 사랑의 자비와 위선(『베니스의 상인』), 사랑의 자유와 가면(『뜻대로 하세요』), 사랑의 정체성과 투사(『십이야』), 사랑의 말과 오해(『헛소동』). 이 다섯 거울을 함께 들여다보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얼마나 다양한 결이 들어 있는지를 보게 된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이 다섯 작품 역시 그 한계를 가진다. 첫째, 결혼이라는 결말이 너무 절대적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 행복은 거의 언제나 결혼의 형태로 온다. 그러나 결혼이 정말로 모든 갈등의 해결인가. 21세기의 우리는 결혼이 종착점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사실을 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그 시작 이후의 이야기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결혼 이후의 일상, 결혼 이후의 권태, 결혼 이후의 새로운 갈등 — 이 모든 것은 희극의 결말 바깥에 놓인다. 그래서 그의 희극은 어떤 면에서 미완성이다.
둘째, 사회적 차별의 문제다. 『베니스의 상인』의 반유대주의는 가장 노골적인 예이지만, 다른 작품들에도 그 시대의 한계가 흩어져 있다. 신분, 성별, 인종에 대한 가정들이 작품 곳곳에 박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그것 때문에 작품 전체를 폐기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 한계를 인식하면서 읽어야 한다.
셋째, 잔치 바깥에 남는 자들의 문제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화해의 잔치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작품 안에 남겨둔다는 점이다. 『뜻대로 하세요』의 자크, 『십이야』의 말볼리오와 페스테,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과 안토니오. 이들은 모두 결말의 행복한 결혼식 바깥에 있는 인물들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들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무대 한 켠에 서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의 정직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행복은 늘 다른 누군가의 불행 옆에서 일어난다. 셰익스피어는 이 사실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다섯 편을 사랑한다. 그것들은 어둠 없는 환한 작품이 아니라, 어둠을 알면서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비극이 인간의 무너짐을 보여준다면, 희극은 인간의 다시 일어섬을 보여준다. 그 다시 일어섬이 완벽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끝까지 잔치 밖에 남아도, 결혼식의 종소리 뒤에 일상의 비가 다시 내려도, 그래도 인간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내밀 수 있다. 그것이 희극의 메시지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비극의 어둠만큼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닫지 않는 마지막 문장
이 다섯 편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한 가지를 새삼 느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저 웃었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나는 그 웃음 안의 슬픔을 보기 시작했다. 세 번째 읽었을 때 나는 그 슬픔 너머의 또 다른 환함을 보았다. 위대한 작품의 특징이 이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라는 만큼 함께 자란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잃어볼수록, 더 많은 것을 얻어볼수록, 작품은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대학교 2학년 봄에 작은 극장에서 본 『한여름 밤의 꿈』을, 나는 아직도 가끔 떠올린다. 그때 무엇이 나를 그토록 사로잡았는지, 이제는 조금 더 잘 안다. 그것은 무대 위의 황당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끝내 사랑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떤 어둠을 통과하고서라도 잔치는 다시 열릴 수 있다는 것을, 그 환한 가능성을 그 좁은 무대가 나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그 감정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다음 장에서 나는 셰익스피어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또 한 명의 거장 — 스페인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 — 의 『돈키호테』를 다루려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같은 날 — 1616년 4월 23일 — 죽었다는 것이다(달력의 차이로 같은 날짜는 아니었지만). 한 사람은 영국에서 인간의 비극과 희극을 무대 위에 올렸고, 다른 한 사람은 스페인에서 한 미친 노인의 모험을 통해 인간의 이상과 현실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두 거장이 같은 시간에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그 풍경을 들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5대 희극』, 신정옥 옮김, 전예원. 한국에서 5대 희극을 한 권으로 묶어 만날 수 있는 표준 번역본 중 하나.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최종철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운율을 살린 정교한 번역. — 윌리엄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최종철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작품의 어두운 결을 충실히 전달한다. — Northrop Frye, Anatomy of Critic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희극의 구조를 신화적 관점에서 분석한 고전. 일부 번역본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 해럴드 블룸, 『셰익스피어 인간성의 발명』, 까치. 5대 희극에 대한 챕터들도 풍부하다. — 스티븐 그린블랫, Will in the World (W. W. Norton, 2004). 셰익스피어의 삶과 그의 희극이 어떻게 그 삶과 맞물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평적 전기. 미번역. — Marjorie Garber, Shakespeare After All (Pantheon, 2004). 셰익스피어 전 작품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동시대 비평서. 5대 희극 각 편에 충실한 장이 할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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