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걸린 전화 — 폴 오스터, 『뉴욕 3부작』을 다시 읽다
1. 새벽 두 시 반의 전화
새벽 두 시 반에 전화벨이 울린 적이 있는가. 그 시간의 전화는 대체로 누군가 죽었거나, 누군가 잘못 누른 번호다. 다니엘 퀸이 받은 전화는 후자였다. 상대방은 "폴 오스터 탐정 사무소"를 찾고 있었다. 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작가였다. 정확히 말하면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막스 워크라는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였다. 이름이 세 겹이었던 셈이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다음 새벽, 같은 시각에 같은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또 끊었다. 사흘째 새벽, 전화벨이 또 울렸을 때 — 퀸은 자기 자신을 폴 오스터라고 소개한다.
여기까지가 폴 오스터의 『유리의 도시』 도입부다. 1985년에 발표된 이 짧은 소설은 잘못 걸린 전화 한 통에서 출발해, 한 남자가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대학원생이었고, 추리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이 책이 추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폴 오스터는 2024년 4월 말, 일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날 저녁, 나는 책장 깊숙이 꽂혀 있던 『뉴욕 3부작』을 다시 꺼냈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잇따라 발표된 세 편의 중편 — 『유리의 도시』(1985), 『유령들』(1986), 『잠긴 방』(1986) — 이 한 권으로 묶인 책이다.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이 추리소설의 외피를 입은 형이상학적 우화에 가깝다는 것을 한층 분명히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우화가 발표된 지 마흔 해 가까이 지난 지금, 디지털 신원이 매일같이 잘못 호명되는 시대에 오히려 더 절박하게 읽힌다는 것도. 이 글은 그 다시 읽기의 기록이다.
2. 유리의 도시 —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
『유리의 도시』의 주인공 다니엘 퀸은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잃은 후 글쓰기로 간신히 자신을 지탱하는 남자다. 그는 워크라는 탐정 캐릭터에 자기 안의 활력을 모두 빌려준 채, 정작 자신은 유령처럼 도시를 떠돈다. 잘못 걸린 전화를 받아 폴 오스터를 사칭하기로 한 순간, 퀸은 무엇을 한 걸까. 표면적으로는 호기심이었다. 실은, 더 이상 자신이고 싶지 않다는 누적된 욕망이 그 사칭에 매달려 풀려난 것에 가깝다.
그가 맡게 되는 임무는 단순하다. 피터 스틸먼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할 위협을 받고 있다. 아버지는 한때 청교도 신비주의를 연구하던 학자였고, 어린 아들을 9년 동안 어두운 방에 가둬 인간이 태초의 언어를 발화하는지를 관찰했다. 이제 그는 풀려나 뉴욕에 도착한다. 퀸의 일은 아버지를 미행해 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추리 장르의 규칙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퀸은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스틸먼을 발견하고, 그를 따라 맨해튼을 며칠씩 가로지른다. 노인의 동선을 지도에 옮겨 적은 끝에 퀸은 어떤 패턴 — 알파벳을 그리며 걷고 있다는 가설 — 을 발견한다. 노인은 자기 발걸음으로 'THE TOWER OF BABEL'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 쓰지 못한다. 퀸의 가설도 다 완성되지 못한다.
이 부분이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충격이었다. 탐정이 단서를 모아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서들이 패턴을 흉내 내는 동안 탐정 자신이 도시의 보도블록 위로 점점 흩어지고 있다. 추리는 도구가 아니라 강박이 된다. 퀸은 결국 스틸먼 부자의 아파트 앞 골목에 자리를 잡고, 거리에서 잠을 자며 출입구를 지키기 시작한다. 옷이 더러워지고, 수염이 길고, 가진 돈은 줄어든다. 그가 점점 더 노숙자에 가까워지는 동안, 그가 지키려던 피터는 — 사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 사라진다.
소설의 끝에서 퀸은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쫓겨났음을 알게 된다. 그는 빈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점차 음식을 거부하며, 노트에 무언가를 쓴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 화자가 등장해 — 그 노트를 발견했다고 — 말한다. 우리가 읽고 있던 것은 그 노트의 재구성이었다는 식으로. 1인칭은 3인칭으로, 3인칭은 익명의 편집자로, 편집자는 다시 폴 오스터라는 이름을 발설한다. 작가의 이름이 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면서 — 책 바깥과 안의 경계가 종이 한 장보다 얇아진다.
오스터가 첫 작품에서 시도한 것은 단순한 메타픽션의 과시가 아니다. 그가 묻고 있는 것은 더 본질적이다. 한 사람이 자기 이름과 직업과 주소를 모두 내려놓았을 때,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를 그 자신이게 하던 것은 정말 이름이었는가, 아니면 이름을 부르던 누군가의 존재였는가. 아내와 아이를 잃은 퀸은 자신을 부르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잘못 걸린 전화에 그토록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유령들 — 감시자가 감시당할 때
『유령들』은 더욱 추상적인 우화로 이행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모두 색깔이다. 블루는 사립탐정이다. 의뢰인 화이트가 블루에게 의뢰한다. 길 건너편 방에 사는 블랙이라는 남자를 감시해 매주 보고서를 보내 달라. 보수는 충분하다. 이유는 묻지 말 것.
블루는 의자에 앉아 창밖 블랙의 창문을 본다. 블랙은 의자에 앉아 — 거의 매일 — 글을 쓴다. 가끔 책을 읽는다. 가끔 산책을 한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난다. 블루의 보고서에 더 이상 쓸 것이 없다. 블랙은 너무 단조롭다. 블루는 점점 자신의 의뢰가 의심스러워진다. 어느 날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감시하는 블랙이 사실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배치된 또 다른 탐정이라는 것을. 어쩌면 화이트가 진짜 의뢰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어쩌면 자신이 보고하던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유령들』의 묘미는 그 단조로움 자체에 있다.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두 남자가 길 건너편에서 서로의 창문을 바라보며 늙어 간다. 행동이 없는 추리소설, 사건이 없는 사건. 오스터는 이 책에서 추리라는 행위 자체를 해체한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을 본다. 보고서는 점점 짧아지고, 결국 무의미해진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잘 모르겠다고 느낀 기억이 있다. 두 번째 읽었을 때, 이 짧은 책이 사실은 '읽기'에 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루가 블랙을 감시하는 방식은 우리가 책을 읽는 방식과 거의 같다.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한 페이지를 넘긴다. 다른 누군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추측한다. 그리고 결국 그 추측이 우리 자신을 향한다.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책에 의해 읽힌다. 블루가 블랙을 감시하는 동안, 블랙이 자기 노트에 적고 있는 것은 — 어쩌면 — 블루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오스터가 두 번째 작품에서 도달한 지점은 무서울 만큼 깔끔하다. 그는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완전한 폐쇄 회로로 만들어 버렸다. 탐정과 용의자가 동일 인물이고, 의뢰인 또한 그 자신이며, 사건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일어난다. 더 갈 곳이 없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스터는 세 번째 책에서 다시 한번 자리를 옮긴다.
4. 잠긴 방 — 사라진 친구의 그림자
『잠긴 방』은 앞의 두 편보다 사실적이다. 화자는 1인칭이고, 이름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는 일곱 살부터 함께 자란 친구 팬쇼가 어느 날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시작한다. 팬쇼의 아내 소피가 화자에게 연락을 한다. 팬쇼는 글을 썼고, 발표한 적은 없지만 책상 서랍에 원고가 가득 들어 있다. 자신이 죽거나 돌아오지 않으면 그것을 검토해 달라는 부탁을 친구에게 남겼다.
화자는 원고를 읽는다. 비범하다. 그는 출판사를 설득해 책으로 펴낸다. 책은 성공한다. 팬쇼는 시인으로, 소설가로, 갑자기 죽은 천재로 추앙받는다. 소피와 화자는 가까워지고, 결혼한다. 팬쇼의 아들을 화자가 키운다. 팬쇼의 인생을 화자가 — 그의 이름은 끝내 모르겠다 —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어느 날, 팬쇼에게서 편지가 온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다시 미궁이 된다. 팬쇼는 살아 있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 다시 만나기를 원치 않는다. 화자가 자신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멈추라고 경고한다. 멈추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화자는 그 협박에 가까운 편지에 더 매혹된다. 그는 팬쇼를 찾아 떠난다. 파리까지, 그리고 그 어느 도시까지.
찾는 과정 동안 화자는 점점 친구를 닮아 간다. 친구의 어머니와도 잤다. 친구의 이름으로 등록된 호텔에 묵었다. 친구의 글쓰기 스타일이 자신의 문장으로 스며든다.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감각, 자신이 친구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자신을 추적하게 만든 것 같다는 감각이 점점 짙어진다.
『잠긴 방』은 사라진 천재 작가라는 익숙한 모티프를 빌리지만, 결국에는 —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한 명 잃는 것이라는, 단순하고 슬픈 진실 — 위에 도달한다. 우리에게 일곱 살부터 같이 자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거의 반사적으로 쳐다보던 거울이었다. 그 거울이 사라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일 수 있는가.
소설의 끝에서 화자는 마침내 팬쇼와 마주한다. 정확히는, 마주하지 못한다. 잠긴 방의 문 앞에 서서 그는 친구의 마지막 노트를 받는다. 그것을 받아들고 거리로 나간다. 그가 한 일은 노트를 펼치고, 한 페이지씩 찢어 강에 던지는 일이다. 친구의 마지막 글이 검은 잉크 덩어리로 강물에 풀어진다. 화자의 일기 같았던 소설이 그렇게 끝난다.
5. 세 편을 가로지르는 그림자
세 편을 잇따라 읽고 나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세 권의 다른 책이 아니라, 같은 책을 세 번 다시 쓴 결과물이다. 다른 인물, 다른 사건, 다른 도시의 구석 — 그러나 같은 구조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따라간다. 따라가는 사람이 따라가는 행위 자체에 의해 따라가지는 사람으로 변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경계가 무너질 때, 두 사람을 그리는 작가의 자리도 함께 무너진다.
세 편 모두에 '폴 오스터'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유리의 도시』에서는 사칭당한 가짜 탐정으로, 그러나 본인이 작가로 살아가는 실재 인물로 출현한다. 『유령들』에서는 색깔 이름들 사이에 등장하지 않지만, 화자가 이 모든 이야기를 어디선가 보고 있다는 감각으로 존재한다. 『잠긴 방』의 화자는 자기 이름을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앞의 두 책을 쓴 것이 아니냐는, 자신을 다른 책의 자신이라고 — 가벼운 자조처럼 — 흘리는 대목이 등장한다.
오스터는 자기 자신을 등장시키지만, 자기 자신을 등장시킴으로써 오히려 자기 자신을 흐릿하게 만든다. 메타픽션의 흔한 효과는 '이건 다 만들어진 이야기야'라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지만, 오스터의 메타픽션은 정반대로 작동한다. 작가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책 안의 인물보다 더 책 안에 갇힌 사람을 본다. 오스터라는 이름은 안전한 외부의 이름이 아니라, 가장 깊숙한 미궁의 중심에 놓인 이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 한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는 보통 이 질문을 사춘기쯤에 잠시 했다가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 우리는 직업, 가족, 학력, 출신, 거주지로 이 질문에 답한다. 그러나 그 답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사건이 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직업의 상실, 가족의 부재. 오스터의 세 주인공은 모두 그런 종류의 빈 자리에서 시작한다. 퀸은 아내와 아들을 잃었고, 블루는 의뢰인의 정체를 잃었고, 화자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그들이 다른 누군가를 끈질기게 따라가는 까닭은, 자기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빈 자리는 다른 사람의 자리로만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 그렇게 그들은 믿는다.
그 믿음의 결말이 세 편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 무섭다. 빈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으로 채우려 한 시도가 우리 자신을 빈 자리로 바꿔 놓을 뿐이다.
6. 우연이라는 형식
오스터의 문학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우연'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우연을 자신의 종교에 가까운 무엇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뉴욕 3부작』의 사건들도 사실은 모두 우연의 산물이다. 잘못 걸린 전화. 길 건너편 방에 들어온 의뢰. 어릴 적 친구의 갑작스러운 실종. 인물들의 인생이 거대한 방향으로 바뀌는 순간은 모두, 그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한 통의 전화이거나 한 통의 편지다.
한국 독자에게 우연이라는 모티프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우리는 일상에서 우연을 자주 말한다. "우연히 만났어." "우연히 봤어." 그러나 문학에서 우연은 약점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잘 짜인 플롯은 인과의 사슬로 이어지고, 우연은 작가의 게으름으로 간주된다. 오스터는 정반대다. 그에게 우연은 게으름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의 구조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우리가 짠 줄거리에 따라 흐른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를 만드는 사건의 거의 전부가 누군가의 의도 바깥에서 도착한다. 잘못 걸린 전화를 받은 다니엘 퀸은 그 전화를 받기로 선택한 적이 없다. 단지 받았을 뿐이다.
이 점에서 오스터의 우연은 그리스 비극의 운명과도 다르다. 운명은 신이라는 외부에서 부과되는 절대 명령이지만, 오스터의 우연은 어떤 신성한 의도도 없는 빈 사건이다. 그 빈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후의 인간이다. 잘못 걸린 전화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다니엘 퀸이 그것을 자기 인생의 전환점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의미 있다고 느끼는 방식이 사실은 이런 사후의 의미 부여라는 사실을 오스터는 슬그머니 보여 준다.
소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 책의 도입부를 자주 권한다. 짧고, 강렬하고, 무엇보다 — 이야기의 시작이 어떻게 한 통의 전화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글쓰기 수업에서 '시작의 충격'이라는 주제로 다룰 때 오스터만큼 적절한 예가 드물다. 그가 가르쳐 주는 것은, 사건은 인물의 결정에서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첫 문장은 인물에게 무언가가 도착하는 순간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7. 도시라는 미궁
『뉴욕 3부작』의 또 다른 주인공은 도시다. 정확히는 1980년대 맨해튼이다. 오스터는 이 도시를 단순한 배경으로 두지 않는다. 도시 그 자체가 거대한 미궁이며, 인물들은 그 미궁 안을 미친 듯이 걷는다. 다니엘 퀸이 스틸먼을 미행하면서 며칠씩 거리를 걷는 장면, 블루가 길 건너편 창문을 응시하는 장면, 화자가 팬쇼를 찾아 보스턴과 파리의 골목을 헤매는 장면 — 이 모든 장면에서 도시는 인물의 머릿속을 외화한 공간으로 작동한다.
뉴욕은 격자형 도로의 도시다. 맨해튼은 위에서 보면 거의 완벽한 좌표평면 같다. 그러나 오스터의 인물들이 걷는 뉴욕은 그렇지 않다. 격자 위에서 그들은 길을 잃는다. 좌표가 분명한 도시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오스터의 인물들은 그 가능성을 증명한다. 좌표가 분명할수록, 그 좌표 위에 자신을 놓을 수 없는 사람은 더 깊이 길을 잃는다.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좌표는 위안이 아니라 고문이다.
도시는 인물을 흡수하는 동시에 노출한다. 군중 속에서 인물은 익명이 되지만, 동시에 늘 누군가에게 관찰당하고 있다. 『유령들』에서 블루는 자신이 블랙을 관찰하는 동안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관찰당하고 있다고 — 책 후반부에야 — 깨닫는다. 도시에서 익명성은 절대적이지 않다. 다만 관찰자가 누구인지 모를 뿐이다. 이 통찰은 1980년대의 뉴욕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정밀하게 관찰당하는 도시에 산다. 신용카드, 휴대전화, 도시의 CCTV, 검색 기록. 우리의 익명성은 환상이지만, 우리는 그 환상을 인생의 조건으로 유지한 채 살아간다. 오스터는 이 조건을 일찌감치 알아챈 작가다.
이 책의 도시는 단지 무대가 아니라, 일종의 영혼의 풍경이다. 인물의 안과 밖이 무너지면서, 도시의 안과 밖도 함께 무너진다. 인물이 길을 잃을 때 도시 또한 그 모양을 잃는다. 거꾸로, 도시가 격자를 유지하는 한, 인물은 그 격자 위에서 자신을 부정해야만 자기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
8. 언어가 무너질 때
『뉴욕 3부작』의 가장 깊은 층은 언어다. 특히 『유리의 도시』에 등장하는 스틸먼 노인의 광기는 언어 그 자체에 관한 광기다. 그가 어린 아들을 9년 동안 가둔 이유는, 사회의 언어에 오염되지 않은 인간이 무엇을 말하는지 — 어쩌면 신의 언어 같은 무엇을 말할 것인지 —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책으로 펴낸 연구의 핵심은, 인간의 언어가 타락 이후 사물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잃었다는 주장이다. 깨진 우산을 부르는 옳은 단어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우산인가, 다른 무엇인가. 스틸먼은 길에서 부서진 물건을 주워 모으며, 사물에 새 이름을 붙이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이 부분은 농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스터의 가장 진지한 주제다. 우리가 쓰는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사물 사이에는 늘 어떤 어긋남이 있다. 우리는 '집'이라고 말하지만 — 누구의 집, 어떤 집, 언제의 집을 우리는 가리키는가. 언어가 사물을 정확히 가리킬 수 있다는 환상은, 어른이 되면 한 번쯤 깨진다. 그 환상이 깨진 뒤에도 우리는 계속 말한다. 깨진 환상 위에서 말하는 것이 어른의 언어다.
오스터의 세 주인공이 모두 글쓰는 사람이라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퀸은 추리소설을 쓴다. 블루는 보고서를 쓴다. 잠긴 방의 화자는 친구의 전기를 쓰고, 친구의 미발표 원고를 읽는다. 글쓰기는 그들의 직업이자,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매달리는 마지막 끈이다. 그러나 그 끈조차 결국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 퀸의 노트는 다른 누군가에게 발견되어야만 의미가 되고, 블루의 보고서는 쓸수록 점점 비어 가고, 잠긴 방의 화자는 친구의 마지막 노트를 강물에 찢어 던진다. 글쓰기가 그들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글쓰기가 자기를 자기 자신과 연결해 주는 행위라는 환상이 그 책 안에서 무너지기 때문이다.
영어 교사로서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매번 멈춘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글쓰기가 자기를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스터는 그 명제의 그림자도 보여 준다. 글쓰기가 자기를 잃는 가장 정교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글로 자신을 정의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글로 정의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에 늘 부딪힌다. 그 부딪힘이 우리를 더 깊이 글쓰기 안으로 밀어 넣는다.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가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 또렷해진다.
9. 세르반테스에서 베케트까지
『뉴욕 3부작』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그 문장 뒤에 줄지어 서 있는 작가들의 그림자를 알아보는 것이다. 오스터는 자신의 계보를 책 안에 노골적으로 새겨 둔다. 『유리의 도시』의 한 장면에서, 사칭당한 폴 오스터는 자기 집에서 다니엘 퀸과 마주 앉아 — 다소 이상한 학술 논문 같은 —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 논문의 주제는 『돈 키호테』다. 정확히는, 『돈 키호테』의 진짜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 1부에서 자신이 이 이야기를 아랍 작가 시드 하메테 베넨헬리의 원고에서 번역했다고 주장한다. 즉 책 안에 또 한 명의 작가가 있다. 오스터의 인물은 한 발 더 나아가, 사실은 돈 키호테 자신이 그 이야기를 쓴 게 아니냐는 가설을 내놓는다. 미친 노인이 자신의 광기를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이 황당하게 들린다면, 그것이 정확히 오스터가 노린 효과다. 그는 자신의 첫 책에서, 자신의 문학적 어머니인 세르반테스를 호명한다. 책 속에 책이 있고, 작가 속에 작가가 있는 구조 — 오스터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구조 — 의 기원이 16세기 스페인의 가난한 작가에게 있음을 그는 분명히 한다.
세르반테스 옆에 호손이 있다. 『잠긴 방』이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호손의 단편 「웨이크필드」의 메아리다. 어느 날 아내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한 채 20년을 옆 거리 셋방에서 산 남자의 이야기. 오스터의 팬쇼는 호손의 웨이크필드의 후예다. 모습을 감추는 것으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한 남자.
그리고 그 뒤에 베케트가 있다. 『유령들』의 정적, 사건이 거의 없는 무대, 두 인물이 서로를 끝없이 기다리는 구조 —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메아리다. 베케트가 무대를 비웠다면, 오스터는 도시를 비웠다. 인물들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거의 모든 것이 그들에게 일어난다.
오스터는 이 계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책이 이 계보의 한 칸을 차지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뉴욕 3부작』은 1980년대 미국 소설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17세기 스페인 소설의 형이상학적 야망을 그대로 물려받은 책이다. 이 점이 이 책을 시간을 견디는 책으로 만든다. 시대의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문제 너머에 있는 문제 —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문제 — 를 다루기 때문이다.
10. 디지털 시대에 오스터를 다시 읽는다는 것
내가 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지 않은 지가 꽤 됐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이 너무 80년대의 책이라는 인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이 노트와 길거리 미행과 우편물로 도착하는 편지. 우리 학생들은 모든 정보가 화면으로 도착하는 세대다. 이 책의 풍경이 그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거라고 예단했다.
오스터의 죽음 이후 다시 읽으면서, 나는 그 예단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 책의 핵심 문제 — 누가 누구를 관찰하는가, 내 이름은 정말 나를 가리키는가, 내가 따라가는 사람이 사실은 나일 수 있다는 의심 — 는 1985년보다 2026년에 훨씬 더 절박한 문제다. 우리는 매일 자신을 잘못 호명당한다. 광고 알고리즘이 우리에 관해 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어제 검색한 단어들이다. 그 단어들이 우리인가. 검색창에 쳤다가 지운 단어들 — 그것이 더 우리에 가까운가.
소셜미디어에서 우리는 모두 일종의 다니엘 퀸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다른 누군가로 잘못 호명하기를, 우리는 종종 기다린다. 잘못 호명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인생을 잠시 살 수 있다. 닉네임, 부캐, 또 다른 계정. 그 사칭은 처음에는 가벼운 놀이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그 사칭이 우리의 본명보다 더 본질적인 자기 표현으로 느껴진다. 본명은 가족이 지어 준 것이고, 사칭은 우리가 스스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스터의 인물들은 그 사칭의 끝까지 가 본 사람들이다. 끝까지 가면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누구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우리 대신 살아 보여 준다. 그들의 인생이 비극적인 까닭은, 사칭이 잘못된 것이어서가 아니다. 사칭이 시작될 때 그들이 도망치고자 했던 자기 자신 — 아내를 잃은 퀸, 단조롭게 늙어 가던 블루, 친구를 잃은 화자 — 으로 돌아갈 길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오스터는 우리에게 일종의 경고를 남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되는 데 성공할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길을 잃는다. 잘못 걸린 전화 한 통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 전화를 끊을 자유가 있다. 그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자유다.
11. 닫히지 않는 책
『뉴욕 3부작』은 닫히지 않는 책이다. 세 편 모두 일반적인 의미의 결말을 갖지 않는다. 『유리의 도시』는 한 노트의 발견으로, 『유령들』은 블루가 길 건너편 방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잠긴 방』은 화자가 강물에 노트를 던지는 장면으로 끝난다. 결말이라기보다는, 책이 더 이상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멈춘 것에 가깝다.
이런 결말 방식이 처음에는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이야기에 끝맺음을 기대한다. 정답이 아니어도, 적어도 그 끝을 어디라고 지어 줄 수 있는 무엇을 기대한다. 그러나 오스터는 그것을 거절한다. 그가 끝맺지 않는 까닭은, 끝맺을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끝나는 순간 그 이야기는 자기를 찾았다는 거짓말이 된다.
다시 책장을 덮으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 책을 다시 읽고 나서 내가 알게 된 것이 늘었다기보다는,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좋은 책의 정의가 그 책을 읽고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라면, 오스터의 정의는 그 반대다. 좋은 책은 자기 자신을 더 잘 모르게 되는 책이다. 더 잘 모르게 됨으로써, 그동안 쉽게 안다고 믿어 왔던 것들의 얕음에 맞닥뜨리게 되는 책이다.
오스터가 떠난 뒤, 그의 책들은 다른 자리로 옮겨 앉을 것이다. 살아 있는 작가의 책은 늘 다음 책을 기다리는 책이다. 죽은 작가의 책은 그 자체로 닫힌 우주가 된다. 오스터의 우주는 그 안에 닫히지 않는 책들로 가득하다. 닫히지 않는 책들로 닫힌 우주. 이 모순은 그가 평생 매달려 온 문제와 정확히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새벽 두 시 반에 전화벨이 다시 울리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화의 메아리는 그의 책장 안에서 계속 울린다. 잘못 걸린 전화를 받지 말 것 — 이라는 가르침은 그가 남긴 것이 아니다. 그는 정반대를 말한다. 잘못 걸린 전화를 받아 보라. 다만, 그 전화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미리 알아두라. 거기에는 다른 누군가의 인생이 있고, 그 인생을 살아 본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지 않은 채로 — 거기에 있다.
나는 책장을 다시 닫는다. 책은 여전히 닫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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