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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함께 고전읽기

마의 산 / 토마스 만

by 구교수 2026. 5. 15.

사흘이 7년이 되는 곳 — 토마스 만, 『마의 산』과 시간이라는 병

1. 멈춘 시간 속에서

시간이 사라진 적이 있는가. 나는 한 번 있다. 몇 해 전 며칠을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큰 병은 아니었다. 다만 학교에 나갈 수 없을 만큼은 됐고, 침대에서 천장을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며칠이 묘했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이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어제 한 생각을 오늘 다시 하고 있었고, 그 생각을 어제 했다는 사실조차 흐릿했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오늘이 며칠인지 한참을 헤아려야 했다. 그러다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한 달을 누워 있으면 어떻게 될까. 한 해를 누워 있으면. 시간이 이렇게 계속 녹아내리면, 나는 언제 내가 멈췄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정확히 그 질문에서 자라난 책이다. 한 청년이 사흘 일정으로 산 위의 요양원에 올라간다. 사촌의 병문안이었다. 그런데 그는 내려오지 않는다. 사흘이 삼 주가 되고, 삼 주가 한 해가 되고, 한 해가 7년이 된다. 7년 뒤 그가 산을 내려오는 것은 그가 결심해서가 아니다. 산 아래 세계에서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를 7년 동안 붙들고 있던 마법은 그가 푼 것이 아니라, 더 큰 폭력이 와서 부숴 버린 것이다.

1924년에 나온 이 1,000쪽짜리 독일 소설을 지금 권하면 대부분 손사래를 친다. 길고, 느리고, 사건이 거의 없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시간이 한 번이라도 자기 손에서 녹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만나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 7년의 산을 한 번 더 올라가 본 한 독자의 기록이다.

2. 평지에서 올라온 사람

주인공의 이름은 한스 카스토르프다. 함부르크 출신의 스물세 살 청년이고, 막 공과대학을 마치고 조선소에 자리를 얻어 둔, 말하자면 인생의 출발선에 선 평범한 사람이다. 토마스 만은 그를 일부러 평범하게 그렸다. 천재도 아니고 괴짜도 아니다.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자기 계급의 상식을 의심 없이 물려받은 청년. 만은 그를 "인생의 문제아"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이 책 전체를 푸는 열쇠 중 하나다. 그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것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할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가 올라가는 곳은 스위스 다보스의 베르크호프 요양원이다. 폐결핵 환자들이 모이는 고급 요양원이다. 사촌 요아힘 침센이 그곳에서 요양 중이고, 한스는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사촌을 보러 잠깐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산에 오른 첫날부터 무언가 어긋난다. 그는 평지에서 가져온 시간 감각이 이 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아챈다. 이곳 사람들은 "삼 주"라는 말을 들으면 웃는다. 이 위에서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는 한 달이라고 누군가 그에게 말해 준다.

도착 첫날의 묘사가 특히 인상적이다. 한스는 기차를 갈아타고 또 갈아타며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평지의 일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요양원에 닿았을 때 그는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낀다. 첫날 저녁 식탁에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사소한 일에 까닭 없이 웃음이 터지는 것을 경험한다. 만은 이 작은 신체 반응들을 꼼꼼히 적어 둔다. 산이 한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체온과 맥박과 웃음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의 미세한 어긋남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함정은 늘 그렇게 작동한다. 큰 문이 쾅 닫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어긋남들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만에 한스 자신이 미열을 보인다. 요양원의 원장 베렌스 고문관은 그의 폐에서 "축축한 자리"를 찾아낸다. 이제 한스에게는 산에 머물 의학적 명분이 생긴다. 여기서 만이 보여 주는 것이 절묘하다. 한스가 정말로 아파서 머무는 것인지, 머물고 싶어서 아파진 것인지를 책은 끝까지 분명히 하지 않는다. 평지의 삶 — 조선소, 직업, 시민으로서의 의무 — 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그의 몸이 알아서 만들어 준 것일 수도 있다. 병이 그를 붙든 것이 아니라, 그가 병을 핑계로 붙들렸을 가능성. 이 의심이 책의 밑바닥에 깔려 7년을 흐른다.

3. 시간이라는 병

『마의 산』의 진짜 주인공은 한스 카스토르프가 아니라 시간이다. 토마스 만은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소설 중간중간에 화자로 직접 끼어들어,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을 이야기로 옮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길게 따진다. 어떤 독자에게는 이 대목이 지루하고, 어떤 독자에게는 바로 이 대목이 이 책의 핵심이다. 나는 후자 쪽이다.

만의 통찰은 이렇다. 내용이 가득 찬 시간은 짧게 느껴지고 길게 기억된다. 텅 빈 시간은 길게 느껴지고 짧게 기억된다. 여행의 첫날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이유, 그리고 단조로운 한 해가 지나고 나면 통째로 증발해 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베르크호프의 시간은 후자다. 환자들은 매일 같은 일을 한다. 다섯 번의 정해진 식사, 정해진 산책, 그리고 발코니에 누워 담요를 두르고 보내는 안정 요법. 하루가 완벽하게 어제와 같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루가 길지만, 곧 한 주가, 한 달이, 한 해가 형체 없이 녹아 흘러간다.

만은 이것을 "영원한 수프"라는 이미지로 표현한다.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수프가 나온다. 그 수프 앞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고인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7년을 머물면서도 자신이 7년을 머물렀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변화가 없는 곳에서는 시간의 눈금이 지워진다. 눈금이 지워진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다만 쌓일 뿐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우리 시대를 떠올린다. 우리는 만의 환자들과 정반대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매일이 자극으로 가득하고, 화면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들이민다. 그러나 결과는 묘하게 비슷하다.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우리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자극이 너무 없어도, 자극이 너무 많고 다 비슷해도, 시간은 똑같이 형체를 잃는다. 만이 100년 전에 그린 "영원한 수프"는 스크롤을 내리는 우리의 엄지손가락 안에서 여전히 끓고 있다.

만이 화자로 끼어들어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은 더 근본적이다. 이야기로 시간을 다룬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적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이다. 이야기는 늘 시간을 압축하거나 늘인다. 그런데 만은 이 책에서 일부러 그 규칙을 가지고 논다. 한스가 산에 머문 첫 삼 주는 거의 수백 쪽에 걸쳐 촘촘하게 그려진다. 반면 마지막 몇 해는 단 몇 쪽으로 휙 지나간다. 책을 읽는 독자의 시간 감각 자체가, 한스 카스토르프의 시간 감각과 똑같이 일그러지도록 만은 설계해 둔 것이다. 처음에는 한 페이지가 길고, 뒤로 갈수록 한 해가 한 문단이 된다. 독자는 이 책을 읽는 행위 자체로 "마의 산"의 시간을 한 번 통과하게 된다. 시간에 관한 책이 독자를 시간의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 — 이것이 만의 가장 대담한 형식적 도박이다.

4. 병이라는 유혹

베르크호프에는 분명한 논리가 하나 있다. 이곳에서 병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격이다. 더 심하게 아픈 사람일수록 더 흥미로운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건강은 평지의 것, 둔하고 단순한 것으로 은근히 격하된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처음에 이 논리에 당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는 자신의 미열을 거의 자랑스러워하게 되고, 체온계를 입에 무는 7분을 하루의 가장 진지한 의식처럼 치른다.

이것이 만이 파고드는 가장 위험한 주제다. 병은 단순히 몸의 고장이 아니라 하나의 유혹이 될 수 있다는 것. 아프다는 것은 평지의 의무에서 면제된다는 뜻이고, 동시에 자신이 보통 사람보다 더 깊고 더 예민한 무언가에 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죽음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 일종의 격조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만은 이 분위기를 매혹적으로 그리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마비시키는지도 함께 그린다. 그는 병을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병이 왜 그토록 쉽게 미화되는지를 정확히 보여 준다.

이 책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가 X선 촬영실에 있다. 한스는 자기 몸속을 처음으로 들여다본다. 화면에 비친 것은 자신의 손이다. 살은 빛에 투과되어 사라지고, 뼈만 남았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골격을, 자신의 무덤을 미리 본다. 살아 있는 채로 자기 죽음을 정면으로 본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한스는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미지에 매혹된다. 죽음을 곁눈질하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응시하는 것 — 이것이 산 위의 사람들이 평지 사람들과 다른 점이고, 동시에 그들이 산을 내려가지 못하는 이유다. 죽음을 한 번 똑바로 본 사람은 평지의 분주한 건강함이 어쩐지 우스워 보인다. 만은 이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함정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베르크호프에는 베렌스 고문관 말고도 또 한 명의 의사가 있다. 크로코프스키 박사다. 그는 환자들의 몸이 아니라 영혼을 다룬다. 정기적으로 강연을 여는데, 주제는 늘 사랑과 병의 관계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병의 뿌리에는 억눌린 욕망이 있다. 몸의 증상은 말하지 못한 마음이 다른 방식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만이 이 인물을 통해 끌어들이는 것은 당대에 막 퍼지던 정신분석의 공기다. 그런데 만은 크로코프스키를 마냥 신뢰할 만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그의 강연은 과학과 신비주의 사이의 어딘가에서 모호하게 떠 있고, 책 후반부에 가면 그는 아예 강령회를 주관하기에 이른다. 환자들이 둘러앉아 죽은 자를 불러내는 그 장면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촌 요아힘이 군복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산 위의 세계는 의학과 주술의 경계가 흐려진 곳이다. 죽음에 너무 가까이, 너무 오래 머문 사람들은 결국 죽음을 과학으로 다루는 일과 죽음을 불러내는 일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만은 이 장면을 거의 무섭게 그리면서, 병의 매혹이 끝까지 가면 어디에 닿는지를 보여 준다.

5. 세템브리니, 평지에서 온 목소리

산 위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를 붙들고 놓지 않는 두 사람이 있다. 둘 다 그의 스승을 자처한다. 첫 번째는 이탈리아인 로도비코 세템브리니다.

세템브리니는 인문주의자다. 그는 이성, 진보, 계몽, 문학, 노동, 시민의 의무 — 한마디로 평지의 가장 좋은 가치들을 대변한다. 그는 한스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걱정한다. 이 순진한 청년이 산 위의 나른한 죽음의 분위기에 잡아먹힐 것을 그는 내다본다. 그래서 그는 한스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내려가라. 평지로 돌아가라. 일하라. 병에 빠지지 말고, 죽음에 매혹되지 말고, 삶의 편에 서라. 그는 한스를 "인생의 문제아"라고 부르며, 그 문제아를 삶 쪽으로 끌어내리려고 7년을 애쓴다.

세템브리니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의 말은 옳고, 그의 의도는 선하다. 그러나 만은 그를 마냥 옳은 사람으로 그리지 않는다. 세템브리니는 가난하고, 그의 낙관주의는 가끔 공허하게 울리고, 그의 웅변은 듣다 보면 손풍금 소리처럼 단조롭게 느껴진다. 그의 계몽주의는 19세기의 좋은 유산이지만, 동시에 20세기의 거대한 어둠 — 곧 닥쳐올 세계대전 — 을 막아 내기에는 어딘가 무력하다. 만은 세템브리니에게 깊은 애정을 품으면서도, 그의 한계를 냉정하게 본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 씁쓸한 사실을 7년에 걸쳐 보여 준다.

영어 교사로서 나는 세템브리니에게서 자꾸 나 자신을 본다. 우리는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세템브리니처럼 말한다. 성실해라, 미루지 마라, 너의 의무를 다해라, 삶의 편에 서라. 그 말들은 옳다. 그러나 그 말들이 옳다는 것과, 그 말들이 한 사람의 내면에 실제로 가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세템브리니는 7년 동안 옳은 말을 했지만, 한스 카스토르프를 7년 동안 산 위에 붙들어 둔 힘을 끝내 이기지 못한다.

6. 나프타, 그리고 절대성의 유혹

두 번째 스승은 훨씬 더 위험하다. 레오 나프타. 그는 책 중반에 등장해 세템브리니의 맞은편에 선다.

나프타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예수회 수도사가 된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는 중세의 신정 정치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한다. 그는 개인의 자유를 비웃고, 이성을 비웃고, 세템브리니가 떠받드는 모든 것을 비웃는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절대성이다. 규율, 복종, 공포,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도달하는 어떤 전체. 그는 테러를 옹호하고, 고통을 옹호하고, 죽음을 삶보다 높은 자리에 둔다.

만이 나프타를 통해 그리려 한 것은 20세기 초 유럽 지식인의 한 위험한 유형이다. 계몽주의의 미적지근함에 신물이 난 똑똑한 사람들이, 그 반동으로 절대성과 폭력에 매혹되던 시대의 공기. 나프타의 논리는 종종 세템브리니의 논리보다 더 날카롭고 더 짜릿하다. 바로 그 점이 무섭다. 나프타의 말을 듣다 보면, 자유와 이성을 옹호하는 세템브리니가 답답하고 낡아 보이는 순간이 온다. 만은 독자가 그 순간을 직접 겪게 만든다. 절대성의 유혹이 왜 그렇게 많은 똑똑한 사람들을 사로잡았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체험하게 한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등이 서늘하다. 만이 이 인물을 쓴 것은 나치가 권력을 잡기 10년 전이다. 그는 다가올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토양에서 자라는지를 본 것이다. 미적지근한 옳음에 지친 사람들, 명료하고 강한 답을 원하는 사람들, 복잡함을 견디느니 차라리 한 사람의 목소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 토양은 1924년에만 있던 것이 아니다.

7. 두 교육자 사이에서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는 한스 카스토르프를 사이에 두고 끝없이 논쟁한다. 삶이냐 죽음이냐, 이성이냐 신비냐, 개인이냐 전체냐, 자유냐 복종이냐. 한스는 그 사이에 앉아 둘의 말을 번갈아 듣는다. 그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두 사람의 논쟁을 일종의 교육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교육의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만이 이 구도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어느 쪽도 이기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가 자신은 분명 세템브리니 쪽에 더 가깝다. 만은 이성과 인문주의의 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편을 손쉽게 승리시키지 않는다. 그는 나프타에게 가장 날카로운 칼을 쥐여 주고, 세템브리니의 약점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 위대한 소설이 사상을 다루는 방식이다. 작가가 옳다고 믿는 것을 등장인물의 입으로 대신 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옳음과 그름이 대등하게 맞붙어 독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

두 사람의 대립은 결국 결투로 치닫는다. 나프타가 세템브리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 당일, 세템브리니는 허공에 총을 쏜다. 그는 사람을 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자 나프타는 — 상대가 자신을 쏘지 않을 것을 알고 — 격분하여 자기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쏜다. 절대성을 신봉하던 자가 마지막으로 행사한 절대적 행위는 자기 파괴였다. 만은 이 결말에 긴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장면은 무겁다. 죽음을 삶보다 높이 둔 사상의 끝이 자살이라는 것을, 그는 한 발의 총성으로 보여 준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본다. 그는 두 스승 중 누구의 제자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만이 한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결론을 내리지 않을 자유. 두 개의 강한 목소리 사이에서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 그것 자체가 하나의 교육의 결과다.

8. 클라브디아 쇼샤, 그리고 발푸르기스의 밤

산 위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를 붙드는 것은 사상만이 아니다. 사랑이 있다. 정확히는, 사랑과 욕망과 병이 한 덩어리로 뭉친 무언가가 있다.

그 대상은 클라브디아 쇼샤다. 러시아 여자다. 식당 문을 늘 거칠게 쾅 닫고 들어와 한스의 신경을 긁는, 어딘가 풀어진 듯한 분위기의 여인. 한스는 그녀에게 첫눈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만은 이 사로잡힘에 묘한 장치를 하나 심어 둔다. 한스는 클라브디아의 눈매에서 어린 시절 같은 반 친구였던 한 소년, 프리비슬라프 히페를 떠올린다. 한스가 소년 시절 마음에 품었던, 그리고 한 번 연필을 빌렸던 그 친구. 클라브디아를 향한 한스의 사랑 안에는 소년 시절의 그 감정이 그대로 겹쳐져 있다. 사랑은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무언가가 다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만의 생각이 여기 박혀 있다.

이 사랑이 폭발하는 곳이 그 유명한 "발푸르기스의 밤" 장이다. 사육제가 열린 밤, 평소의 규율이 느슨해진 그 밤에 한스는 마침내 클라브디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그런데 그는 독일어로 말하지 않는다. 프랑스어로 말한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함으로써, 그는 평지의 한스 카스토르프라면 결코 입에 담지 못했을 말들을 쏟아 낸다. 외국어가 그에게 일종의 가면이 되어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장의 끝에서 그는 소년 시절 히페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클라브디아에게 연필을 빌린다. 100쪽도 더 전에 묻어 둔 연필 모티프가 그 밤에 다시 살아난다. 만의 소설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예다. 그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묻어 두었다가, 가장 깊은 순간에 다시 꺼낸다.

이 밤 이후 클라브디아는 산을 떠난다. 한스는 그녀를 기다리며 산에 남는다. 사랑조차도, 이 책에서는 한스를 내려가게 하는 힘이 아니라 머무르게 하는 힘이다. 산 위의 모든 것은 결국 한스를 붙드는 방향으로만 작동한다.

9. 페퍼코른, 말을 이기는 존재

세템브리니의 웅변과 나프타의 논리, 두 개의 거대한 말이 7년 동안 한스의 머리 위를 오갔다. 그런데 책의 후반부에 그 두 개의 말을 동시에 무력하게 만드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민헤르 페퍼코른이다.

페퍼코른은 네덜란드인 커피 농장주다. 그는 떠나갔던 클라브디아 쇼샤가 다시 산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동반자로 함께 온다. 흥미로운 것은 페퍼코른이 거의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의 문장은 늘 중간에 흩어진다. 손짓은 거창한데 내용은 좀처럼 도달하지 않는다. 논리로 따지면 그는 세템브리니나 나프타의 상대가 못 된다.

그런데도 페퍼코른이 방에 들어서면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말이 갑자기 작아진다. 그에게는 "인격"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로 사람을 압도하는 힘. 만은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건드린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종종 옳은 논리가 아니라 강한 존재감이라는 것. 우리는 누가 더 타당한 말을 하는지를 보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압도적으로 거기 있는지를 보고 따른다. 세템브리니의 옳은 말도, 나프타의 날카로운 말도, 페퍼코른의 더듬거리는 존재감 앞에서는 한순간 빛이 바랜다.

페퍼코른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자신의 생명력이 쇠해 가는 것을 견디지 못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삶을 가장 압도적으로 살아 낸 인물이, 삶이 약해지는 것을 가장 견디지 못한다. 만은 이 인물을 통해 묻는다. 논리도 아니고 존재감도 아니라면, 한 인간을 끝까지 지탱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만의 잠정적인 대답이, 바로 다음 장에 있다.

10. 「눈」, 이 책의 심장

『마의 산』에서 단 한 장만 읽으라면 나는 「눈」 장을 권한다. 1,000쪽 가운데 이 장이 이 책의 심장이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어느 날 혼자 스키를 타러 나갔다가 눈보라에 갇힌다. 길을 잃고, 추위에 의식이 흐려지고, 죽음이 바로 곁에 다가온다. 그 혼미한 상태에서 그는 꿈을 꾼다. 꿈의 앞부분은 더없이 아름답다. 햇빛 가득한 남쪽 바닷가, 아름답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사는 평화로운 풍경. 그러나 그 꿈은 곧 뒤집힌다. 그 평화로운 사람들의 등 뒤, 한 신전 안에서 끔찍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마녀들이 어린아이를 찢어 먹고 있다. 아름다움과 야만이 같은 풍경의 앞면과 뒷면이었던 것이다.

이 꿈에서 한스는 한 문장에 도달한다.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고, 7년의 이야기가 여기로 흘러왔다고 해도 좋은 문장이다.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하여, 죽음에게 자기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니다. 한스는 7년 동안 죽음을 똑바로 응시해 왔다. 그러나 죽음을 응시하는 것과, 죽음이 내 생각의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다르다. 죽음을 알되, 삶의 편에 서는 것. 어둠을 보았으되, 선과 사랑 쪽으로 한 걸음 더 가는 것. 산 위의 모든 사상과 유혹을 통과한 끝에 한스가 스스로 길어 올린 이 결론은, 세템브리니가 7년 동안 외쳤던 말과 결국 같은 자리에 닿는다. 다만 이번에는 누가 외쳐 준 것이 아니라, 한스가 죽음의 문턱에서 자기 손으로 건져 올린 것이다.

그리고 만은 잔인할 만큼 정직하다. 눈보라에서 살아 돌아온 한스는 따뜻한 방에서 몸을 녹이고,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그 문장을 잊는다. 그날 밤이 지나기 전에 그 깨달음은 흐려진다. 우리도 그렇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는 순간은 분명히 온다. 그러나 그것을 붙들고 사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만은 깨달음의 위대함과 그 깨달음이 얼마나 쉽게 증발하는지를 같은 장 안에 나란히 놓았다. 이 정직함이 이 장을 위대하게 만든다.

11. 천둥소리

7년이 흐른다. 그동안 사촌 요아힘은 산을 내려가 군대에 들어간다. 그는 평지의 의무를, 한스가 끝내 외면한 그것을 택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병은 낫지 않았고,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와 끝내 숨을 거둔다. 의무를 택한 자가 먼저 죽고, 머무름을 택한 자가 남는다. 만은 이 아이러니에 어떤 교훈도 달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되었다고 적을 뿐이다.

요아힘이 떠나고, 클라브디아도 페퍼코른도 떠나고, 나프타는 자살하고, 세템브리니는 늙고 병들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산 위에서 점점 더 멍해진다. 그는 거의 식물처럼 시간 속에 잠겨 있다. 7년째 되던 해, 그를 깨운 것은 어떤 깨달음도, 어떤 사람도 아니다. 만이 "천둥소리"라고 부른 사건. 산 아래 평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전쟁은 베르크호프의 마법을 단번에 깬다. 시간이 멈춰 있던 그 공간으로 역사가 난폭하게 밀고 들어온다. 한스는 마침내 산을 내려간다. 그러나 그가 내려가는 곳은 그가 7년 전 떠나온 평온한 일상이 아니다. 진흙과 포화의 전쟁터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한스 카스토르프가 다른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 섞여 포탄이 쏟아지는 들판을 달리는 모습을 본다. 그가 살아남는지, 죽는지, 만은 알려 주지 않는다. 화자는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잘 가라, 인생의 문제아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죽음의 잔치 위에서,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만이 이 책을 끝낸 방식이다. 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7년의 마법, 두 스승의 논쟁, 「눈」 장의 깨달음 — 그 모든 것을 통과한 한스를 만은 끝내 구원하지 않는다. 그는 한스를 역사 속으로, 우리 모두가 들어간 그 20세기 속으로 떠밀어 보낸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거의 기도처럼, 사랑의 가능성을 묻는다.

12. 12년에 걸쳐 쓰인 책

『마의 산』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책은 쓰는 데 12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12년의 한가운데를 제1차 세계대전이 가로질렀다.

토마스 만이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한 것은 1912년이다. 원래는 짧은 이야기로 계획됐다. 비슷한 시기에 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일종의 가벼운 짝, 죽음과 병을 다루되 좀 더 풍자적인 톤의 중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만 자신의 아내가 다보스의 요양원에 머문 적이 있었고, 만은 그곳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그 방문의 인상에서 한스 카스토르프의 산이 자라났다.

그런데 1914년 전쟁이 터지면서 집필이 멈춘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만 자신이 크게 흔들린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것은 소설이 아니라 길고 논쟁적인 산문이었다. 거기서 그는 독일적인 것을 옹호하고,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말하자면 한때의 만 안에는 세템브리니보다 나프타에 가까운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 뒤에야 만은 입장을 바꾼다. 그는 공개적으로 공화국을 지지하고, 이성과 인문주의의 편에 선다.

이 전기적 사실이 중요한 까닭은, 『마의 산』의 세템브리니-나프타 논쟁이 단순히 작가가 머리로 설계한 사상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만이 자기 안에서 실제로 치른 싸움이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두 스승 사이에서 7년을 흔들린 것처럼, 만 자신이 그 두 목소리 사이에서 10년 넘게 흔들렸다. 그래서 이 책의 논쟁에는 머리로만 쓴 글에서는 나올 수 없는 온도가 있다. 작가가 어느 한쪽을 손쉽게 이기게 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 있다. 그는 두 목소리를 모두 자기 것으로 살아 봤기 때문에, 어느 쪽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집필에 걸린 12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이 책의 주제와 겹친다는 점도 묘하다. 시간에 관한 책이, 그것을 쓰는 데 든 긴 시간을 그대로 자기 몸에 새기고 있다. 1912년에 시작한 문장과 1924년에 끝낸 문장 사이에는 한 시대가 통째로 들어가 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산 위에서 7년을 보내는 동안 평지의 세계가 전쟁으로 무너졌듯, 만이 이 책을 쓰는 동안 그가 알던 유럽이 무너졌다. 그래서 『마의 산』은 한 청년의 7년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한 작가가 자기 시대의 붕괴를 통과하며 입장을 다시 세운 기록이기도 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지막 장의 천둥소리가 소설 속 사건만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인생을 둘로 가른 천둥소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13. 지금, 『마의 산』을 다시 오른다는 것

100년 전 독일 소설을, 그것도 1,000쪽짜리를 지금 왜 읽어야 하는가. 나는 몇 해 전이라면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사이에 한 가지를 함께 겪었다.

팬데믹의 시간이 그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동안 일종의 베르크호프에 갇혀 살았다. 평지의 일상이 멈췄고, 하루가 어제와 똑같았고, 시간이 형체를 잃고 녹아내렸다. 우리는 그제야 만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몸으로 알게 됐다. 멈춘 시간은 평화가 아니다. 멈춘 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병이다. 그리고 그 병에는 묘한 안온함이 있어서, 사람을 그 안에 계속 머물게 한다. 격리가 풀린 뒤에도 평지로 선뜻 돌아가지 못하던 그 감각을, 한스 카스토르프는 100년 먼저 살아 보여 주었다.

교사로서 나는 이 책을 학생들에게 통째로 권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너무 길다. 그러나 「눈」 장만큼은 언젠가 읽히고 싶다. 그 안에 우리 시대 청소년들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스는 어둠을 외면해서 답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병을, 야만을, 절대성의 유혹을 전부 똑바로 들여다본 다음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선과 사랑 쪽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을 모르는 채로 밝은 것은 순진함이지만, 어둠을 다 보고도 밝은 쪽을 택하는 것은 용기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 차이를 알려 주고 싶다.

이 책이 100년을 견딘 이유도 거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의 산』은 한 시대의 특정한 풍경 — 1900년대 초 알프스의 결핵 요양원 — 을 그리지만, 그 풍경 안에 시대를 넘어서는 질문을 묻어 두었다. 시간이 멈춘 자리의 안온함은 왜 그토록 사람을 붙드는가. 옳은 말은 왜 강한 존재감을 이기지 못하는가. 죽음을 응시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삶의 편에 설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결핵이 거의 사라진 지금도 조금도 낡지 않았다. 무대 장치는 낡았지만 무대 위에서 던져진 질문은 낡지 않은 책 — 그것이 고전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일 것이다.

『마의 산』은 친절한 책이 아니다. 빨리 읽히지도, 시원한 답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시간이 한 번이라도 자기 손에서 녹아 본 적이 있는 사람, 멈춘 자리의 안온함에 발이 묶여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정확히 자기 이야기로 읽힌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7년 만에 산을 내려갔다. 그를 내려가게 한 것은 천둥소리였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깨우는 천둥소리가 무엇인지를, 이 책은 묻는다. 그리고 더 어려운 질문을 하나 더 남긴다. 천둥소리가 울리기 전에, 스스로 내려갈 수 있겠는가.

나는 책을 덮는다. 다보스의 눈은 100년째 그 페이지 위에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