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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함께 고전읽기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by 구교수 2026. 5. 15.

춤추는 자와 생각하는 자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삶을 온전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가끔 이 질문을 저녁 무렵, 하루 일과가 끝난 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던져본다. 오늘 나는 진짜로 살았는가. 두려움 없이, 계산 없이, 후회를 미리 장전하지 않고.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적당히 살았고, 적당히 웃었고, 적당히 지쳤다. 그런 밤이면 어김없이 한 이름이 떠오른다. 조르바. 알렉시스 조르바. 춤추는 사람, 웃는 사람, 실패해도 노래하는 사람.

처음 이 소설을 펼쳤을 때 나는 솔직히 말해 조르바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 시끄러웠고, 너무 충동적이었으며, 너무 무책임해 보였다. 그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잃어버려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삶이 어떻게 독자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가. 나는 소설을 덮으면서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내가 조르바를 좋아하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내가 그를 너무나 부러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크레타 섬의 광산과 한 권의 소설이 태어나기까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946년 『그리스인 조르바』를 출간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씨앗은 훨씬 더 오래전,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조르르스 조르바스(Giorgis Zorbas)라는 인물과 함께 크레타 섬의 갈탄 광산을 운영했던 1917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존 인물 조르바스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노동자였으며, 카잔차키스는 그와 함께 수개월을 보내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는 한 인간을 만났다. 실패한 광산 사업은 카잔차키스에게 경제적 손실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가장 풍요로운 인간적 체험이기도 했다. 소설은 그 기억의 재구성이다.

카잔차키스라는 작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소설을 온전히 읽기 어렵다. 그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파리, 베를린, 베를린을 오가며 공부했고, 베르그송과 니체, 불교와 기독교 신비주의를 동시에 흡수했다. 그의 사상 여정은 어느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기를 거부한다. 그는 마르크시스트이기도 했고, 니체주의자이기도 했으며, 불교 수행자이기도 했다가, 결국에는 자신만의 이름 없는 종교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그 사상을 가장 압축적으로 담아낸 텍스트가 『영적 수련(Spiritual Exercises)』 혹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지만,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은 단연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카잔차키스를 거의 몰랐다. 그래서 나는 소설의 서술자 '나'(작중에서 '두목'이라 불리는 젊은 지식인)를 단순히 배경 인물로 읽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읽었을 때, 나는 '나'가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조르바는 태양이지만, 그 태양을 바라보는 눈이 없으면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 눈이다. 그리고 카잔차키스 자신이기도 하다.

소설의 구도는 단순하다. 서술자인 나는 크레타 섬에서 갈탄 광산을 운영하기로 한다. 실패할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도피처럼 섬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피레우스 항구에서 우연히 만난 조르바를 데려온다. 조르바는 주방장 겸 광부 감독 역할을 맡아 함께 살아가게 되는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와 조르바가 벌이는 사건들이 소설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롯은 간소하다. 그러나 그 간소한 플롯 안에서 카잔차키스는 삶과 죽음, 자유와 책임, 정신과 육체, 지식과 경험이라는 묵직한 테마들을 쉬지 않고 돌려가며 탐문한다.


조르바라는 인간의 실체 — 삶을 그 자체로 껴안는 방식

조르바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이 캐릭터의 매력이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는 광부이자 요리사이고, 연주가이며 춤꾼이다. 그는 여러 여자를 사랑했고, 여러 나라를 떠돌았으며, 여러 번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조르바의 철학은 복잡한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행동이고, 몸짓이며, 무엇보다 춤이다.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광산 운반 장치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장면이다. 모든 것이 실패했다. 수개월의 노력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갔다. '나'는 망연자실해 서 있고, 조르바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한다. "두목, 이런 재앙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웃는다. 그리고 춤을 춘다.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말하기가 어렵다. 황당함인가, 경이로움인가. 실패를 앞에 두고 춤을 춘다는 것. 그것은 무책임인가, 아니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용기인가.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해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인간'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두 원리를 대비시킨다. 아폴론은 질서, 이성, 형식, 절제의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혼돈, 도취, 생명력, 황홀경의 신이다. 근대 문명은 지나치게 아폴론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삶의 근원적 충동을 억압하게 되었다고 니체는 진단했다. 조르바는 바로 그 디오니소스적 에너지의 화신이다. 그는 생각하기 전에 움직이고, 이해하기 전에 사랑하며, 계산하기 전에 웃는다.

그러나 나는 조르바를 단순히 니체의 문학적 번안으로 읽는 데 만족하지 못한다. 조르바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고통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삶이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위해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목격했고, 아이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전쟁을 겪었다. 그 모든 것을 품에 안고서도 그는 춤을 춘다. 이것은 낙관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완전한 긍정이다. 고통을 포함한 삶 전체에 대한 긍정. 나는 그것을 읽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조건부로 삶을 긍정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조르바가 서술자 '나'에게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춤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구경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어려운 진리다. "당신은 머리가 너무 많습니다, 두목." 소설에서 조르바가 '나'에게 던지는 이 말은 사실 독자에게도 향한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 너무 많이 생각한다. 생각이 삶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허용해 왔다. 행동하기 전에 결과를 계산하고, 사랑하기 전에 상처를 예측하며, 기뻐하기 전에 그 기쁨의 유효기간을 따진다. 조르바는 그런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그것만이 진실이다.


서술자 '나' — 책과 삶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인간

조르바가 빛이라면, '나'는 그 빛이 비치는 그림자다. 소설의 서술자는 고학력 지식인이다. 그는 단테를 읽고, 불교 경전을 연구하며, 정치와 예술에 대해 사유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향해 달려가지 못한다. 생각이 다리가 되어주지 않고,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그는 아는 것이 많지만, 사는 것은 서툴다.

나는 이 캐릭터 안에서 나 자신을 오래 보았다. 책을 읽고 사유하는 것이 삶을 더 잘 살게 해준다고 믿으며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망설인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에 나는 더 많은 정보를 찾고, 더 많은 조언을 구하며, 더 긴 시간을 숙려한다. 그 결과 나는 많은 것을 놓쳤다. 최적의 결정을 내리려다가, 결정을 내릴 기회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 이것이 지식인의 역설이다.

카잔차키스는 이 역설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소설의 '나'는 훌륭한 인간이다. 그는 도덕적이고, 섬세하며, 타인을 배려할 줄 안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살지 않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가 조르바를 가까이 두는 이유는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모른다. 조르바는 '나'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준다. 두려움 없이 달려들고, 실패해도 웃으며,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오늘을 연소시킨다. 조르바는 '나'의 대리 자아이고, '나'의 억압된 충동이며, '나'가 꿈꾸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관계에는 불균형이 있다. '나'는 조르바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소설의 결말에서 '나'는 변화한다. 조르바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뒤, 그는 처음으로 춤을 춘다. 홀로, 서투르게.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변화다. 반면 조르바는 어떤가. 조르바는 '나'를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소설은 이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않는다. 조르바는 이 소설에서 스승이고 관찰 대상이지만, 그의 내면이 깊이 탐문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소설은 한계를 보인다. 조르바는 너무 완전한 인물이어서, 역설적으로 조금 납작하다.


자유의 두 얼굴 — 해방인가, 무책임인가

조르바를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붙잡혀 있었던 질문이 있다. 그의 자유는 진짜 자유인가. 아니면 단지 책임에서의 도피인가.

조르바는 묶이지 않는다. 그는 특정한 장소에 정착하지 않고, 특정한 관계에 구속되지 않으며, 특정한 신념 체계에 갇히지 않는다. 그 자유는 분명 경이롭다. 하지만 나는 그 자유의 뒤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르바의 자유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떠나온 여인들, 그가 남겨둔 아이들, 그가 미완으로 버려두고 간 약속들. 소설은 그것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다. 조르바의 자유를 찬미하는 데 바쁜 나머지, 그 자유의 비용이 누구에게 청구되었는지를 묻지 않는다.

이것은 이 소설의 중요한 결함 중 하나다. 소설 속 여성 인물들, 특히 부블리나 마담과 마을 과부 소렐은 조르바의 매력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부블리나 마담은 조르바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서서히 무너진다. 과부 소렐은 마을 남성들에게 집단적 폭력의 제물이 되고, 소설은 그 장면을 묘사하면서도 충분한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다. 카잔차키스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은 삶의 충만함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등장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가진 주체로는 충분히 그려지지 않는다.

현대의 독자, 특히 젠더 의식이 달라진 세계에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이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그랬다. 소렐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읽을 때, 나는 소설이 그 폭력에 더 명확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를 찬미하는 소설이 특정 인간들의 자유, 즉 여성의 자유와 안전에 대해서는 이토록 무감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소설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가진 눈먼 곳을 직시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르바의 자유 개념이 가진 핵심적 통찰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란 외부 조건의 산물이 아니라 내면의 태도라는 것이다. 조르바는 감옥에 있어도 자유롭고, 풍요로워도 가난하며, 아무것도 없어도 충만하다. 그 자유는 소유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집착하지 않음에서 온다. 모든 것을 사랑하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의 '무집착'과 묘하게 겹친다. 카잔차키스가 불교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겹침은 우연이 아니다.


산투리와 춤 — 언어 이전의 언어

조르바는 산투리를 연주한다. 산투리는 그리스의 전통 타악기 현악기로, 채로 현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조르바에게 산투리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는 언어다. 슬픔, 기쁨, 분노, 그리움, 그 모든 것이 산투리 소리 안에 녹아 있다.

나는 음악이나 춤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몸으로 표현하는 것에 서투르고, 리듬을 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서 조르바의 춤 장면들이 더욱 낯설게, 동시에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조르바는 말이 막히거나 감정이 넘칠 때 춤을 춘다. 언어가 다다르지 못하는 곳에 춤이 도달한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이 점에서 나는 조르바를 일종의 체현된 철학자(embodied philosopher)로 읽는다. 그는 철학을 글로 쓰지 않는다. 그는 철학을 살아낸다. 사르트르가 카페에 앉아 자유를 논했다면, 조르바는 폐허가 된 광산 앞에서 자유를 춤으로 증명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을 때, 조르바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침묵 대신 춤을 춰라." 말이 닿지 않는 곳에는 몸이 간다. 생각이 멈추는 곳에서 리듬이 시작된다.

카잔차키스는 이 장면들을 통해 지식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독서와 사유로 쌓은 지식은 삶의 특정 영역에서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죽음 앞에서, 실패 앞에서, 불가역적인 상실 앞에서 지식은 조용해진다. 그 침묵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 예술이고, 춤이고, 음악이다. 나는 이 구조 안에서 카잔차키스가 니체뿐 아니라 베르그송의 영향을 깊이 받았음을 감지한다. 베르그송은 이성과 분석이 놓치는 삶의 유동성, 즉 '엘랑 비탈(élan vital)'을 강조했다. 조르바의 춤은 그 엘랑 비탈의 가장 생생한 문학적 표현이다.

소설에서 '나'가 마침내 조르바의 죽음 소식을 듣고 홀로 춤을 추는 장면으로 끝맺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가 조르바로부터 마침내 무언가를 배웠음을 뜻한다. 언어와 사유의 인간이 몸의 언어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완전한 변화가 아니다. 그의 춤은 분명 서투르고 어색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다. 카잔차키스는 독자에게 완성된 조르바를 모방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시작하라고, 서투르더라도 몸을 움직여라고 말한다.


조르바를 오독하는 방법들 — 소설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그리스인 조르바』는 종종 오독된다. 가장 흔한 오독은 이 소설을 단순한 '자유주의의 찬가'로 읽는 것이다. 조르바처럼 살아라, 계획을 버려라, 오늘을 즐겨라. 이런 메시지로 소설을 압축하는 것은 너무 쉬운 해석이다. 그런 식의 독서라면 조르바는 그저 고급스러운 자기계발서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더 복잡하고 더 고통스럽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문제다. 조르바는 결심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태어난 것에 가깝다. 반대로 '나'는 결심한다고 해서 조르바가 될 수 없다. 소설은 이 간극을 정직하게 인정한다. 두 사람은 끝내 다른 존재다. 조르바는 크레타를 떠나고, '나'는 남는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나'를 조금 변화시켰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두 번째 오독은 조르바를 순수한 긍정의 인간으로 이상화하는 것이다. 조르바는 어두운 면이 있다. 그는 무모하고, 때로는 잔인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그것을 충분히 직면하지 않는다. 그의 자유는 아름답지만, 그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그가 지불하지 않은 비용들이 있다. 소설은 그 비용을 명시하지 않지만, 독자는 행간에서 그것을 읽어야 한다.

세 번째 오독은 조르바를 그리스 혹은 지중해 문화의 특수성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조르바는 그리스인이기에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식의 독해. 이것은 소설이 제기하는 보편적인 인간적 질문을 문화적 차이의 문제로 축소시킨다. 조르바의 문제는 어느 문화에서든 삶을 살아내는 방식에 관한 것이며, 그것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어디에서도 동일하게 유효한 질문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특히 한국 독자들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조르바를 흠모하되 그를 모방하려 하지 말라. 조르바에게서 배우되, 그의 그림자도 읽어라.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당신 안의 '나'를 직시하라. 당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조금 살고 있는지를.


조르바가 남긴 것, 그리고 내가 남겨두어야 할 것

조르바를 읽고 나서 나는 한동안 내 삶의 방식을 의심하며 살았다. 더 충동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더 많이 웃고 더 적게 계획해야 하는가. 더 자주 춤을 춰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그러나 결국 조르바를 잘못 읽은 데서 나온 질문들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카잔차키스가 이 소설을 통해 전달하는 핵심은 '조르바처럼 살아라'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당신이 억압하고 있는 것과 화해하라'에 가깝다. '나'는 조르바를 만남으로써 자신이 삶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물러나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선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것을 '접촉'이라는 단어로 이해한다. 조르바는 삶과 완전히 접촉하는 인간이다. 그는 슬픔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기쁨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실패를 등으로 받아낸다. 그는 삶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지 않는다. 반면 '나'는, 그리고 어쩌면 나는, 삶을 종종 유리창 너머에서 관찰한다. 더 안전한 거리에서, 더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그 유리창을 깨는 것이 조르바를 읽는 이유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1964년 마이클 카코야니스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앤서니 퀸이 조르바를 연기했다. 영화 속 시르타키 춤 장면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소설보다 영화로 조르바를 먼저 만났다. 하지만 영화가 놓치는 것이 있다. 영화는 조르바의 에너지는 포착했지만, 소설 속 '나'의 내면, 즉 지식인의 고통과 갈등과 점진적 변화를 충분히 담지 못했다.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조르바의 춤은 '나'의 시선을 통해서만 그 깊이를 갖는다.


삶을 완전히 살았다는 것의 의미

소설의 말미에서 조르바는 죽는다. 그의 마지막을 알리는 편지 한 장이 '나'에게 도착하는데, 그 편지에는 조르바가 죽기 직전까지 춤을 추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어떤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슬픔인지, 부러움인지, 경외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춤을 추다가 죽는다는 것. 그것은 삶을 완전히 살았다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극적인 선언이다. 조르바는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삶을 향해 달려갔다. 카잔차키스는 이 결말을 통해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춤추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후회하며 죽을 것인가.

이 질문은 잔인하다. 동시에 정직하다. 삶을 온전히 산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야 갑자기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부터, 작은 선택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 하지 않은 것을 내일 하겠다고 미루는 것. 지금 표현하지 않은 사랑을 나중에 표현하겠다고 아껴두는 것. 오늘의 기쁨을 다음 주의 안전과 맞바꾸는 것. 이 모든 선택들이 누적되어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카잔차키스 자신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는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파문의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금서가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고,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지만 끝내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쓰고, 사유하고, 여행했다. 1957년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묘비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졌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조르바의 삶을 쓴 사람이 자신의 비문에도 조르바의 정신을 새긴 것이다.


책 속의 책, 삶 속의 삶

이 소설을 읽은 뒤 당신이 덮는 순간, 무언가가 변해 있기를 바란다고 카잔차키스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의 속내라고 믿는다. 위대한 소설은 독자를 건드린다. 완전히 뒤집지는 않더라도, 어떤 한 곳을 살짝 밀어낸다. 그 밀림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덮은 뒤에도 삶을 조금 다르게 본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있다. 카뮈와 카잔차키스는 동시대인이었고, 둘 다 삶의 부조리를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긍정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시지프를 행복한 자로 상상해야 한다"는 카뮈의 선언은 "실패해도 춤을 춰야 한다"는 조르바의 행동과 어딘가 닮아 있다. 또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함께 읽으면 조르바의 철학적 계보를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이 소설로부터 한 가지를 가져갔다. 삶을 더 많이 접촉하려는 의지. 유리창 너머가 아닌, 유리창 이쪽에서. 계산하기 전에 한 발 먼저. 후회를 예약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나는 조르바가 되지 못한다. 아마 결코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안의 '나'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조르바 쪽으로 밀어갈 수 있다.

다음에 다루고 싶은 이야기는 존재의 '반복'에 관한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소설들, 특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한 번뿐인 삶"이라는 조르바의 직관과 어떻게 대화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조르바가 긍정하는 삶은 반복되지 않기에 소중한가, 아니면 반복된다 해도 기꺼이 긍정할 수 있기에 소중한가. 그 질문은 아마도 다음 챕터에서야 조금 더 선명해질 것이다.